고희 잊은 열정…한국예술종합학교 산증인 이강숙 前 총장

입력 2009-01-24 06:00:00

음악가이자 교육자, 문화 CEO, 작가. 이강숙(73) 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총장의 직함은 다양하다. '팔방미인은 굶어 죽는다'고 했지만 이 전 총장은 예외에 해당한다. 각 분야마다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받을 정도로 결과물도 '만족'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한예종 총장직을 그만둔 뒤 작가로 데뷔했고, 뛰어난 평가도 받았다. 고희(古稀)를 넘어선 나이에도 그의 활동은 좁아지지 않는다. 지난해부터는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조성추진위원장도 맡았다.

지난 14일 대구경북디자인센터 12층 접견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8층 회의실에서 열린 회의 참석차 대구를 찾은 터였다. 파란색 안경줄이 유난히 눈에 띄는 노신사는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인터뷰 녹음을 위해 기자가 꺼내든 MP3플레이어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자신도 녹음기가 하나 필요한데 어떤 것을 구하면 되는지를 물었다. 글 쓰는데 필요한 눈치였다. 녹내장에 걸렸어도 글 쓴다고 컴퓨터 작업을 끊지 못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만남은 1시간이 채 안됐다. 그러나 답변만 시작하면 이야기가 물줄기처럼 쏟아졌다. 도저히 중간에 끊기 힘들 정도였다. 본인 스스로 "말이 너무 많다 싶으면 적당히 끊으라"고 할 정도였다.

◆한예종과의 긴긴 인연

이 전 총장 얘기를 하면서 한예종을 빠트릴 수 없고, 한예종을 말하면서 그를 건너뛸 수 없다. 1992년 학교 설립 시작 단계부터 뛰어들어 2002년 2월 퇴임할 때까지 10여년의 세월을 바쳤다. '굳이 외국 유학을 보내지 않고도 국내에서 우리 손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국제적 인재로 양성해 보자'는 설립 취지에 맞게 한예종은 그 사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학교로 우뚝 섰다. 그는 "한예종이 질식하려는 한국 사회에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 전 총장이 한예종 총장을 맡은 것은 오기였지만 현재처럼 일궈낸 이야기는 전설 수준이다. 건물도, 사람도, 예산도 없이 종이(설치령)만 한 장 달랑 있는 한예종 총장직을 맡은 것은 '비굴하다'는 이수정 전 문화부 장관의 말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글을 통해 우리나라 예술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던 터. 그런데 정부에서 제안이 들어오자 몇 차례나 고사를 거듭했다. KBS 교향악단 초대 총감독으로서 행정일을 제대로 못해 그만두었던 기억, 서울대 음대에서 처음으로 음악이론 전공을 만들어 제자들을 받아 막 시작하려던 상황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의 반년이 흘러가자 이 전 장관이 '예술학교, 좋은 학교 만들어야 한다고 글로는 많이 썼는데, 그 내용을 현실화하기에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은 비굴한 것 아니냐?'고 말하더군요. 사람이 부분적으로 다 비굴하고 속물적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막상 나를 그렇게 꼬집어서 얘기하니 그 말이 걸리더라고요. 결국, 그렇게 어려운 서울대 교수직 사표를 내고 예술학교로 갔죠." 막상 총장 자리에 올랐지만 서류 한 장만 들고 일을 하려니 앞날이 막막했다. 당시 한예종 설립 사업을 담당했던 문화부 소속 공무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평소 신념대로 주장을 관철시켰다. 공무원들은 이 전 총장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구설에 한 번 오르지 않았다.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행정의 문외한은 '행정의 달인'이 됐고,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문화 CEO'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퇴임 이후 석좌 교수로 다시 교육자의 자격으로 한예종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음악교육자 이강숙

이 전 총장의 음악 인생은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됐다. 음악을 좋아한 아버지가 축음기가 있었던 덕이다. "어머니 말씀이 축음기 소리에 음정이 떨어지면 칭얼거렸다고 해요. 돌아가신 형님(전 이강백 내과의원 원장)도 음악을 참 좋아했어요"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돌을 지나고 아버지가 죽으면서 집안이 기울었다. '상당히 많이 가난한 시절' 집안 형편상 정식 음악교육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혼자 뒹굴면서 한 음악공부' 덕택에 노래는 곧잘 했고, 이것이 기회를 불러왔다. 국민학교 4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 대신 들어온 음악 선생님의 눈에 띄어 각종 콩쿠르에 나가 상도 많이 탔다. 음악 선생님의 소개로 피아노 선생님도 만났다.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구걸' 피아노로 연주 공부를 한 끝에 서울대 작곡과에도 진학했다. 피아노과로 전공을 바꾼 뒤 계명대 조교수 시절(1965~1968)을 거치면서 실기를 해 온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석사 과정은 음악문헌학, 박사 과정은 음악교육학을 선택했다. 음악인류학이니 음악사회학, 음악미학, 음악철학 같은 것을 공부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을 실제로 하는 것과 하는 것에 대한 앎 가운데 앎에 대한 공부"였다.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만큼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글도 써 왔다. '우리나라 음악문화가 어떤 것이 좋은 것이냐?' '어떤 음악교육 제도가 좋은가?' '왜 한국사람은 자기 음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음악하면 서양음악으로만 부르느냐?' 등이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다 보니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심지어 통계학까지 공부하게 됐다.

음악교육 철학을 물었다. 그는 "모든 것은 다 교육의 산물이다. 음악교육은 전체 인간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음악과 인간 삶의 문제, 사회·역사 문제를 통합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인간교육은 치워버리고 음악교육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교육학과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외국 유학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절에 '문화'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나 제대로 있었을까? 이 전 총장은 "한국의 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7월부터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조성추진위원장 활동을 하고 있는 그에게 대구의 문화에 대해 물었다.

-대구의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대구가 고향인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간 뒤 외부에서 활동을 쭉 하다 왔어요. 요즘 대구에 내려와서 보면 '살아 움직이는 도시'처럼 보이거든요. 사람들을 만나서 회의를 해 보면 너무나 발랄하고 좋은 의견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다 융합해서 조화롭게 이끌어 새로운 문화창조 분위기를 만들지 고민입니다."

-대구 문화계의 분열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요.

"그런데 한 가정도 안에서 보면 부부끼리 '짜글짜글'하면서 살아도 밖에서 보면 그런지 몰라요. 대구도 안에서 보는 것하고 밖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은 저도 밖에서 보는 입장인데, 앞으로 일 때문에 (대구에서) 오래 살면 안에서 보는 시각도 생기겠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어떤 사회, 어떤 계층에서도 반드시 분열이 생기게 돼 있어요.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와 조직, 그리고 현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다르다고 봅니다. 나는 '어디에 가나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보니까 '여기도 사람 사는 데구나' 이렇게 느끼거든요. 그리고 세포가 분열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 성장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아요. 자기만 옳다는 소리를 하는 거거든요."

-대구문화발전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요?

"현재 문화발전소에서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논의를 통해서 굳혀 나가면 됩니다. 그 시간이 너무 길게 지지부진하면 '뭐하려고 하나?' 이렇게 될 겁니다. 맥이 빠지기 전에 일단 다른 누구도 아닌 대구시민을 위하는 문화발전의 씨 뿌리기 행사를 할까 합니다. 가시적으로 시민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행사로 '대구에서 무언가 하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유명한, 누구라도 관심을 가지는 음악가, 연극인, 소설가 등 각 창작 분야 전문가를 불러 그들만의 베스트를 보여주도록 합니다. 이게 일회성으로 끝나면 '웃기는 짓'이라 하겠지만, 1주일 혹은 1년에 한 번이라도 지속적으로 하면 '어! 뭣 좀 하네'라고 하겠죠. 이렇게 자그마한 일부터 시작해서 발동을 걸어 놓은 다음에는 거대한 계획,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도 큰 틀 안에서 해야 합니다. 큰 틀이란 전 세계인이 한국에 오면, 한국 사람도 대구에 가면 여기 한 번 가보자 하는 곳으로 만들어서, 결국 대구시민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3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전 총장은 "자신의 인생에 몇 점을 주겠느냐?"는 질문에 "61점"이라고 답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은 이제껏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청년시절 꿈을 되살려 작가의 길을 걷고 있고 고향에서 새 문화 창조에 남은 삶을 불태우고 싶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고 묻자 "굉장히 소중한 남편!"이라고 답했다. '문화의 정의'를 내려달라고 했다. 이 전 총장은 "경제는 몸이 사는 거라고 치면 문화는 마음이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명쾌하게 답을 주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msnet.co.kr

▨ 이강숙은?=1936년 경북 청도생. 경북고 졸업후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음악과 조교수(1965~68) 생활 뒤 미국으로 유학, 휴스턴대 음악문헌학 석사(1968~70)·미시간주립대 음악교육학 박사(1970~75) 과정을 거쳤다. 버지니아 커먼웰스대학 음악과 조교수(1975~77)를 거친 뒤 귀국,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1977~92)로 활동했다. 199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이 돼 2002년까지 재임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5년에는 '피아니스트의 탄생' 등의 소설을 썼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이며, 지난해부터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추진위원장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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