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와 안동 땅에 걸쳐 있는 청량산. 산 치고는 작았다. 봉화의 험준한 산들 거의가 1,000m를 넘지만 청량의 키는 870m다. 하지만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일행의 속좁은 편견은 사라졌다. 높지는 않지만 낙동강을 만나 병풍 같은 벼랑을 이루고, 산 전체가 깎아지른 기암절벽(12봉우리)이어서 결코 인간들에게 그 터전을 쉽게 내주지 않는 산이었다.
청량산에서 전해 내려오는 삼각우(三角牛) 설화에 따르면 뿔이 셋 달린 소가 연대사(지금의 청량사 자리에 있었던 절)를 창건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다가 연대사가 완공되자 지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려한 자연환경을 가졌지만 인간에겐 편안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고, 수도와 학문수양의 길만 내준 것이다.
불교와 유교를 빼놓고는 청량산을 말할 수 없다. 신라와 고려 1천년의 세월동안 불교의 도량이었고, 조선시대에는 퇴계로 대표되는 유교의 도장이다.
청량산에 법당과 요사채를 갖춘 절은 청량사뿐이다. 하지만 확인된 절터만 27개나 남아 있다. 바위틈에서 샘이 나오는 곳이면 터를 닦고 암자를 지어 수도승들이 거처했던 것이다. 27개의 절터는 거의가 세인들은 결코 오르기 힘든 절벽 틈에 위치, 일행에게 경이로움을 던졌다.
절터들을 한꺼번에 보기 위해 전망대(어풍대)에 올랐다. 청량정사 뒷산 중턱에 위치한 어풍대에서 청량사 병풍인 봉우리(자소봉, 금탑봉, 경일봉)를 바라보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옛날 암자를 그렸다. 하늘의 별처럼 암자가 기암절벽 사이에 매달려 있었고, 칠흑 같은 밤 암자가 경쟁이라도 하듯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상할수록 놀라움이 더했다.
청량산 곳곳에는 절터임을 알려주는 깨진 기왓장이 지천에 널려 있어 왜 청량산이 불교의 요람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청량산에는 지금도 원효·의상대사와 연관된 지명,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의상과 관련된 의상봉(지금의 연화봉)·의상굴·의상암 등이 있고, 원효봉·원효대·원효암 등은 원효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지명이다. 하지만 의상과 원효가 머물면서 수도했다는 의상암과 원효암은 절터만 남아 있고, 관련 기록은 없다.
안동대 주승택 교수는 "유교의 나라 조선을 거치면서 절이 무너지고 승려들이 떠나 절이나 암자에 소장되어 있던 각종 기록도 함께 없어졌다. 현재 청량산과 불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혀줄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청량산은 유교의 도장으로 바뀐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유록(遊錄)을 남기면서 청량산 12봉 명칭(당시는 불교식)을 유교식으로 바꿨다. 청량산이 불가의 산에서 유가의 산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도윤 청량산문화연구회 사무국장은 "요즘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절을 많이 찾듯이 조선의 젊은 선비들도 과거 준비를 위해 절을 찾는 것이 상례였다. 특히 당시 예안(지금 안동 땅)의 선비들이 청량산을 많이 찾았다"며 "자연스레 청량산이 불교의 요람에서 유교의 학문 수양지로 변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민호 봉화 학예연구사는 "청량산이 유가의 도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퇴계 이황의 영향 때문"이라며 "청량산은 퇴계학의 성지로, 퇴계는 물론 퇴계 이후 후학은 물론 영남과 기호지방(경기도)의 선비들도 청량산을 찾아 공부하며 유록을 남겼다"고 밝혔다.
정 연구사는 "퇴계는 15세 때 처음 청량산에 들어와 공부를 했고,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이었던 송재 이우도 10여년간 청량산에서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고 학문적으로도 일가를 이뤘다"고 했다.
퇴계는 자신의 서당을 청량산에 지으려고 했으나 물을 구하기가 힘들어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세웠다고 전해지니 퇴계가 얼마나 청량산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청량사 인근에는 청량정사라는 곳이 있다. 퇴계가 공부하던 자리에 후학들이 퇴계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퇴계 사후 청량정사는 영남 유림의 강학(책을 읽고 그 뜻을 강론) 장소였고, 구한말에는 안동지역 유림들의 의병활동 거점이자 정신적 지주로도 활용됐다고 한다.
청량산은 또 '산수(山水)문학'의 보고이다. 현재까지 수집된 것을 포함해 100여편의 기행문과 2천500여편의 시를 '갖고 있다'. 주세붕은 물론 퇴계 이황 등 수많은 선인들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그 내용을 담은 유록을 남겼으니 말이다. 산세가 얼마나 빼어나기에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와 관료들이 청량산의 골골을 돌아다녔겠는가. 청량산에서 학문을 수양하던 수많은 선비들도 짬을 내 청량산을 유람했을 정도였다. 일행도 청량산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산세와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래서 청량산은 유교의 도량이면서도 '산수문학의 보고'로 그 이름을 조선 팔도에 알렸던 것이다.
안동대 주승택 교수는 청량산문화연구회에 기고한 글에서 "선비들이 청량산을 찾는 것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퇴계와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구도의 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청량산이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 비운의 왕인 공민왕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청량산 일대에는 공민왕 때 쌓았다는 산성의 흔적, 공민왕이 군율을 어긴 죄수를 처형했다는 전설이 어려 있는 밀성대, 다섯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순찰을 다녔다는 오마도, 공민왕당, 산성마을 등 공민왕 유적과 설화들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청량산까지 왔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적과 설화가 공민왕이 청량산을 직접 다녀갔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 같다.
공민왕은 왜 청량산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것일까? 당시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몽진을 한 공민왕은 안동을 거쳐 최후의 보루인 청량산으로 들어왔다. 산세가 험하고, 적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어서 삼국시대부터 천혜의 군사요새였기 때문이다.
정민호 학예연구사는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 봉화군 명호·재산면 일대에는 공민왕과 그 계열신을 모신 사당이 분포돼 있고, 공민왕 때 축조되었다는 왕모산성과 청량산성의 흔적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이런 정황상 공민왕은 분명 청량산을 요새로 삼아 산성을 개축하고 군사를 훈련해 이곳을 거점으로 대반격의 기회를 노리지 않았을까?
청량산을 그냥 등산하기 좋은 곳으로만 여겨 산세만 보고 간다면 청량의 진면목은 결코 알 수 없을 터. 이제 청량을 찾는 이들은 청량의 불교와 유교문화의 진수, 산수문학의 보고와 공민왕의 흔적들을 마음껏 가슴속에 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봉화·마경대기자
사진·정재호기자
자문단 정민호 봉화 학예연구사
정도윤 청량산문화연구회 사무국장
김주현 낙동강수계관리위원회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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