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름 뭐야" 목소리 큰 고객이 대접받는다?

입력 2009-01-17 06:00:00

세상은 참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소비자로서 거대 기업을 상대로 싸울 때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울화가 치밉니다. 그러다보니 애꿎은 A/S 담당 직원에게 고함을 지르고 때론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목청을 높이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조분조분 말할 때에는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절대 들어줄 수 없다던 담당자가 화를 내면서 "당신 이름 뭐야?"라고 고객이 반응하면 그제서야 해결책을 제시하더라는 겁니다.

도대체 회사에서 말하는 원칙은 무엇일까요? 물론 자기 잘못을 회사측에 떠넘기는 얌체 고객들 때문에 나머지 선의의 고객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불만이 있으면 무조건 목소리부터 키우라'는 게 아닙니다. 원리와 원칙이 통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고함치기 전에 고객 입장을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이 뭐야?

회사원 L(36)씨는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 잔뜩 기대했던 영화였지만 한창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무렵 돌연 스크린이 까맣게 변하고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10초 이상 이런 상태가 지속됐지만 스크린은 먹통이었고 관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뭐야? 왜 이래?"하는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1분 가량이 지나서야 영화는 다시 시작됐다. 기분이 상했지만 영화가 끝나면 사과의 말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L씨. 하지만 정작 울화통이 터지는 일은 영화 상영이 끝난 뒤부터. 극장 측은 사과 한 마디 없이 관객들을 내보냈고, L씨 일행이 창구까지 찾아가서 항의를 하자 그제서야 관계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극장 관계자는 이런 항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과도 했다고 주장했다. 상영관 앞문으로 나가는 관객들 뒷통수에 대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 게다가 "우리 잘못도 아니고 영화 배급사에서 온 필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언성이 높아질 무렵, 갑작스레 관계자는 사과와 함께 초대권 2장씩을 건넸다. 이유는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관계자에게 이름을 알려달라고 항의했기 때문. 담당자 이름을 모르니 뒤늦게 항의해도 소용없고,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도 없더라는 말과 함께. 일이 커질까봐 겁이 난 관계자는 부랴부랴 태도를 바꿨던 것. L씨는 "사과와 함께 초대권을 받았지만 기분이 찜찜했다"며 "처음부터 진심 어린 사과만 했어도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K(38)씨는 휴대폰 수리를 맡기러 갔다가 기분이 몹시 상했다. 휴대폰을 구입한 지 일년 조금 지난 무렵, 버튼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뜯어 본 수리기사는 대뜸 "기판이 제대로 작동을 안해서 새 것으로 교체해야겠다. 수리비 포함해서 28만 원"이라고 했다. 구입한 지 일년 밖에 안됐다는 항의에 담당자는 "보증기간이 일년인데, 일주일이 경과했다"고 말했다. 물이 들어가거나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화가 나고 속도 상했던 K씨는 "사용상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일년 만에 기판을 바꾸라는거냐?"고 항의했고, 담당자는 "규정 때문인데 왜 항의하느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어이가 없어진 K씨는 "결국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데 당신은 왜 화를 내느냐? 당신 이름이 뭐냐?"고 따졌다. 상황은 급반전. 안색이 변한 수리기사는 "무상수리가 가능한 지 알아보겠다"며 안쪽 사무실로 사라졌다. 3분쯤 뒤에 돌아온 담당자는 "이번만 특별히 무상수리를 해주겠다. 수리비도 따로 필요없다"고 했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던 주부 C(35)씨. 3년 약정을 하고 처음 가입할 때 10만원권 상품권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갑자기 이사를 갈 상황에 놓인 C씨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해지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담당자는 "약정기간이 남아있어서 해지는 힘들다"며 "대신 다음달부터 요금을 30% 할인해주겠다"고 했다. 해지했다가 다른 업체에 신규가입하는 것도 귀찮을 수 있겠다 싶어서 잠시 솔깃했던 C씨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는 할인을 안해주었냐?"고 묻자 담당자는 "계속 이용해주는데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지 의사를 밝히지 않고 이용했더라면 연간 10만 원 가량 더 내야 할 판. 결국 C씨는 남은 약정기간에 대한 위약금을 물고 해지한 뒤 보다 싼 요금의 초고속 인터넷 상품에 가입했고, 아무런 불만없이 사용하고 있다.

새로 산 자동차에서 나는 이상 소음 때문에 결국 엔진을 통째로 교환하게 된 J(30)씨. 이렇게 교환을 받기까지, 앞서 자동차 고장 때문에 속 깨나 썩었던 친구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처음에 가서 이상한 소리가 나니까 교환해 달라면 절대 안해줍니다. 회사측에서 도저히 손 볼 수 없는 이상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죠." J씨는 자동차를 구입한 지 한 달 만에 지정A/S센터를 찾았다. 손을 봤다고 했지만 며칠 못 가서 다시 소음은 시작됐고, 이상이 발생할 때마다 A/S센터로 달려갔다. 그러기를 7, 8차례. 담당자도 J씨의 얼굴을 알 정도가 됐다. "얼마나 더 수리를 받으러 와야 합니까? 고쳐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때도 됐잖습니까?"라고 항의하는 J씨에게 담당자는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했고 결국 엔진을 통째로 교환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해 PDP TV를 샀다가 결국 몇 달만에 환불을 받아낸 K(40)씨. 사연인즉 이랬다. TV를 산 지 며칠 되지 않아 발생한 잔상 문제 때문에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10분 정도만 한 채널을 보고 나면 다른 채널로 돌려도 이전 방송사의 로고가 화면 상단에 남아있다는 것. 이 때문에 항의도 하고 수차례 수리도 받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K씨는 제품 교환을 요구했지만 때마침 해당 제품이 단종된 상태여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K씨는 몇 달전에 구입한 가격 그대로 환불받을 수 있었고, PDP 가격이 크게 떨어지다보니 새로 나온 신제품을 보다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환불까지 가능했던 이유는 제품 구매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회사측에 알렸기 때문. 고객이 제기한 불만은 A/S센터에 기록이 남게 되고, 고객 실수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회사도 알게 됐다는 것.

◆목소리 크면 다른 사람이 불이익을 볼 수도

모 백화점 관계자는 "브랜드마다 팀장 및 매니저가 있는데, 고객의 부당 반품 및 환불 요구가 들어오면 고스란히 이 사람들의 인사고과에 불이익으로 작용한다"며 "아울러 다른 고객이 받을 서비스 기회를 빼앗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화장품 매장의 경우, 제품을 반 이상 써버린 뒤에 환불 또는 반품해달라고 요구하거나 샘플 제품은 반환하지 않고 정상제품만 반품하겠다고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 이런 경우도 팀장의 인사고과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유는 고객에게 제품 사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 화장품 매장 관계자는 "고객마다 직원이 최소한 10분 이상, 길게는 30분 가량 제품에 대해 설명하는데 뒤늦게 찾아와서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환불해달라는 경우가 있다"며 "이른바 '진상 고객'에게 제품에 대해 설명하느라 들인 시간은 물론이고, 반품하러 와서 1시간 넘게 직원을 괴롭히고 욕을 하면서 다른 고객의 쇼핑을 방해한다"고 푸념했다.

의류 매장의 경우, 여러 차례 입어서 때가 묻은 옷을 들고와 처음부터 옷에 이상이 있었다고 환불이나 반품을 요구하는데, 점장이 옷 값을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의류매장 한 매니저는 "값 비싼 외투 때문에 한 차례 소동을 벌이고 나면, 그날 수입은 고스란히 날리게 되고 다른 고객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대할 수 없게 된다"며 "일부 브랜드의 경우 자체 소비자 만족센터를 운영하면서 이처럼 반복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은 별도로 관리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진상 고객이 엉뚱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백화점 관계자는 "제품에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고객 스스로 자신의 요구가 부당하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유통업체의 친절 마케팅을 역이용한 악의적인 클레임이 많다"며 "때문에 브랜드별로 진상 고객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서비스 업종에서 근무하고 있는 A(30)씨. 6년째 각종 휴대전화 업체를 돌아다니며 고객 민원을 처리하는 서비스 직종에서 일해온 탓에 '목소리 큰 고객'이라면 아주 이가 갈릴 정도. 하지만 이렇게 경험도 다 써먹을 때가 있었다. A씨는 남자친구의 휴대전화를 자신의 명의로 이전한 뒤 제대로 실력발휘를 시작했다. 구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늘 말썽을 부렸던 것. 평소 자신이 당했던 경험을 그대로 되살려 AS센터 직원에게 큰 소리를 치기 시작한 것. "AS기록을 보라고요. 벌써 수리만 6번째인데 언제까지 사람 귀찮게 할거여요? 더 이상 AS센터를 방문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도 못 참겠으니 퀵 서비스 기사를 보내든가 알아서 하세요." 빠져나갈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고객과의 전화통화가 녹음돼 기록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만약 이번에 수리 맡겨서 또 고장이 발생하면 무조건 100% 환불하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아두었다. 결정적 쐐기타도 잊지 않았다. "당신 이름이 뭐야?" 휴대전화 회사측에서는 요구대로 퀵서비스 기사를 보내 전화기를 가져갔고, 메인보드를 열어 확인한 결과 다시 고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전액 환불해주겠다"고 알려왔다. 결국 A씨는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보조금을 지불받아 13만원에 구입했지만 제조업체 판매정가인 58만원을 환불받을 수 있었다. 큰 소리 한번 치고 45만원의 수익이 발생한 셈이다. A씨는 "반복되는 고장의 원인을 놓고 사람좋게 이야기할 때는 '수리하면 된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다가 꼭 목소리를 높여야 제대로 원인을 밝히며 환불을 해 준다"며 "나 역시 서비스업체에서 근무하지만 결국은 까다롭게 구는 만큼 대접받는 세상"이라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