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③곳곳에 역사·문화유산

입력 2009-01-16 06:00:00

▲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 아래 축서사에서 바로 본 소백준령. 우리나라 사찰 전경의 백미라고 단언해도 이견이 없을 정도다.
▲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 아래 축서사에서 바로 본 소백준령. 우리나라 사찰 전경의 백미라고 단언해도 이견이 없을 정도다.

백두대간과 문수산 등지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봉화의 물야면, 봉화읍, 영주, 예천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 낙동강의 큰 지류다.

내성천은 봉화의 역사와 문화, 삶을 품고 있다. 내성천 탐방은 일행에겐 봉화의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내성천의 첫 물줄기를 찾기 위해 물야면 소재지를 거쳐 오전약수터의 병풍인 선달산, 주실령, 박달령, 옥돌봉 탐사에 나섰다. 오전약수터로 갈수록 백두대간의 설경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길 위협을 무릅쓰고 오전약수터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폭설이 '웬수'였다.

오전약수터는 물맛이 좋아 조선시대 최고의 약수터로 알려져 있지만 오전약수터를 찾은 이유는 따로 있다. 오전약수터는 내성천의 실질적인 샘이다. 대간에서 흘러내린 물이 오전약수터를 기점으로 천(川)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약수를 마시면서 오전약수터가 내성천과 나아가 낙동강의 큰 젖줄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오전약수터의 병풍 중 한곳인 박달령은 강원도 영월로 통하는 길목이다. 박달령에는 알려지지 않은 슬픈 전설이 숨어 있다. 봉화군이 '문화콘텐츠'로 개발 중이기도 하다. 조선의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시키자 영남 사람들이 단종을 보기 위해 박달령을 넘었고, 박달령에서 영월 땅을 보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남의 민심이 단종의 유배를 애틋해하자 수양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영남의 민심을 등에 업고 단종복위운동을 꿈꿨고, 영남의 민심에 위기를 느낀 수양이 단종 복위를 꿈꾼 금성대군과 순흥부(지금의 영주 땅)를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이야기다.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박달령 비애'를 뒤로하고 내성천의 주 발원지인 문수산 턱밑의 축서사로 향했다. 불교 조계종의 선(禪)승인 무여 큰스님이 계신 곳인 축서사는 673년 의상 대사가 창건했으나 6·25로 인해 대웅전과 요사채를 제외하고는 소실됐었다. 하지만 불사를 거듭해 지금은 옛 영광을 되찾고 있다.

축서사 뒤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다. 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한 폭의 그림이다. 한 폭의 그림뿐이랴. 경내 대웅전을 등지고 바라본 전경은 우리나라 사찰 전경의 백미라고 단언한다. 영주 땅의 웅대한 소백준령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준령을 절 아래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소백준령 너머 지는 해를 머릿속에 담아 보니 축서사의 절경은 한 폭이 아니라 파노라마 그 자체였다. 봉화 땅을 다닐수록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축서사에 또 있는 것이다.

축서사는 절경만 가졌을까. 축서사는 영주의 부석사보다 먼저 창건돼 영주 부석사 창건 때 절 인부들의 밥을 해 날랐다고 한다. 또 보물 제995호인 석부좌상 부광배가 있다. 보통의 부처 광배와는 그 모양새가 달랐고, 마치 연꽃이 활짝 피고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내성천변에는 봉화를 대표하는 마을들이 모여 있다. 물이 있으면 마을이 생기고 자연 인물이 나게 마련인 법. 봉화읍 유곡리에는 안동 권씨 집성촌인 닭실마을이 있다. 봉화를 대표하는 전통마을로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장소로 등장할 만큼 많이 알려져 있다.

닭실마을은 조선 중기 충절로 이름 높은 문관인 충재 권벌 선생이 입향한 후 후손(100여 가구)들이 500여년간 살아오는 곳이다. 또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은 곳이다. 마을 이름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는 '금계포란' 형국에서 유래됐다.

닭실은 소장 유물만 약 5천여점에 달하며 이 중 약 10%인 482점의 유물이 보물로 지정되는 등 자체 박물관도 갖고 있다. 또 내성천의 계곡인 석천계곡 등 주변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국내 건축가들로부터 최고의 정자 반열에 오른 청암정과 석천정사 등의 정자도 갖고 있다.

봉화읍 해저리의 바래미(海底·바다밑이라는 뜻) 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마을의 여러 고택과 종택 중 남호구택과 만회고택은 독립운동 역사가 담긴 숭고한 곳이다. 봉화 근대사의 자랑거리이다.

남호구택은 일제 때 경상도의 명망 높은 부호인 남호 김래식 선생이 살던 곳.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시 전 재산을 저당하고 대부받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했다. 만회고택은 조선 말기 문신인 만회 김건수 선생이 학문을 위해 건립한 전통와가이다. 만회고택이 주목받는 것은 3·1운동 직후 해저 출신의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 내성천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유기 역사를 세운 봉화 유기의 산실이다. 봉화읍 신흥리에는 현재 고해룡·김선익씨가 경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봉화 유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봉화 유기는 500여년의 역사를 잇고 있고, 전국의 장인들에게 유기 제조기술을 전파한 우리나라 유기 제조의 발상지라고 한다. 안성의 유기 제조법도 봉화로부터 전래됐다고. 마을 앞에 내성천이라는 풍부한 물이 있는데다 쇠를 녹이는 데 필요한 숯이 태백준령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과거 봉화 유기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봉화의 역사·문화자산이 이들뿐이랴. 봉화는 이제 꼭꼭 숨은 역사·문화자산을 외부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글 이종규 기자 봉화·마경대 기자 사진 정재호 기자

자문단:정민호 봉화 학예연구사 정도윤 청량산문화연구회 사무국장 김주현 낙동강수질관리위원회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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