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와 함께] 「未遂」/ 정진규

입력 2009-01-15 06:00:00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목백일홍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 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에 그쳤다

시인은 사물들과 어느 정도 소통하고 있는 걸까. 여기 내통에 대한 시가 있다. 내통은 당연히 단절과 짝짓기를 하는 법. 글씨를 모르는 대낮과 글씨를 아는 사람의 비교가 그것이다. 전자는 글씨를 모르긴 하지만 싱싱하고 건강한 생명체이고 후자는 글씨를 알긴 하지만 욕망에 가까운 존재다. 욕망을 외면한 저 대낮의 순진무구함과 욕망의 자질구레함을 문자로 숱하게 옮겨본 사람의 대비는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선연하게 나뉘어진다. 사물들의 순진무구함은 대낮과 칡덩쿨의 숲으로 여성성이다. 그 풍경에 문득 불청객처럼 끼어든 사람의 움직임은 분명 남성성이다. 여기까지는 여름날의 풍속화인데 갑자기 시는 풍속 가운데 반전을 마련한다. 대낮의 여성성과 화자의 남성성을 바탕으로 준비된 잠깐 사이의 환해짐은, 사람이 다가가자 긴장하는 듯 보이는 저 대낮은 결국 적멸보궁에 가까운 고요함을 유지하고, 오히려 사람은 저 대낮의 높이와 깊이라는 비밀 앞에서 추락하고 만다. 유희를 방해했다는 자책이 앞서지만 세계의 천의무봉 일부를 엿본 셈이다. 다시 정리하자. 들키고 이르지 못한 수유의 어느 지점에서 사물과의 내통과 단절을 통해 오히려 시인은 사물의 비밀과 자신을 연대시키는 데 성공했다, 라고 읽고 싶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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