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단폭격'(Carpet bombing)은 월남전까지만 해도 전쟁상대국의 결전의지를 꺾기 위한 주요 전략이었다. 그 시초는 1942년 2월 13일 동부 독일의 드레스덴에 대한 영국공군(RAF)의 공습이었다. 그 이전까지 RAF의 독일 폭격은 군수공장 등 군사목표물에 집중하고 민간인 밀집지역은 '가급적' 피했다. 형식적이나마 인도적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적국의 민간인도 적군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고 한 아더 해리스 장군이 RAF 총사령관이 되면서 폭격방식은 바뀌었다.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폭격기로 최대 면적을 쥐새끼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라."
영국이 무차별 폭격전술로 전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독일이 영국의 古都(고도) 코벤트리를 폭격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설도 있고 동부 독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 폭격으로 유럽 바로크문화의 본산으로 불렸던 아름다운 드레스덴은 잿더미가 됐다. 불바다가 된 도심의 온도는 1천500도나 됐고 그 불지옥 속에서 최소 13만5천 명, 최대 25만 명이 연기로 사라졌다.
융단폭격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공습, 베트남전 등으로 이어지며 현대전의 주요전략으로 자리 잡았으나 1991년 걸프전 이후 목표만 골라서 파괴하는 '정밀폭격'에 자리를 내주었다. 폭탄 투하량만큼 타격의 효율이 높지 않다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민간인의 대량 사망이라는 비인도적 문제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연이은 공격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7일 공습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는 689명이며 이 중 어린이가 220명에 이른다고 한다. 6일에는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와 의료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어린이를 포함, 48명 이상이 사망했다. 지하 벙커에 은신해 있는 하마스 지도자를 표적 살해할 정도로 정밀한 폭격기술을 자랑하는 이스라엘군이 정밀타격 대상을 확대한 것인가. 유태인은 히틀러에 의한 민족 絶滅(절멸)의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픔이 있다. 그런 유태인의 지난날을 기억하는 지구촌은 어린아이 희생까지 서슴지 않는데 분노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런 국제사회 여론에 부담을 느꼈는지 매일 3시간 동안은 폭격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차제에 무차별적 폭탄세례만은 거두었으면 싶다.
정경훈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