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살아가는 길

입력 2009-01-05 08:53:04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라는 제법 긴 이름의 단체가 있다. 1987년에 몇몇 뜻을 모은 의사들을 중심으로 창립하였고, 대구·경북에는 1995년 6월 간판을 내걸었으니 그 이름만큼이나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난 셈이다. 언뜻 거창해 보이지만, 요컨대 이러니저러니 따지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를, 이리저리 말만 앞세우지 말고 작은 행동으로나마 옮겨보자는 모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뭔가 딱딱하고, 선뜻 살가운 정이 가지 않는 이름이기는 하다. 애초에 모임을 만들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벌이던 풍경 중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는 이런저런 예문을 늘어놓았다. 그 중에는 '위험한 차도가 아니라 안전한 인도를 이용하자는 교통안전운동을 벌이는 의사 단체'라는 생뚱맞은 대목도 있었다. 당시에는 마냥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지만, 요즈음 같이 안팎이 뒤숭숭하고 이상 열기로 달아오르는 시절엔 '안전한 인도'라는 구절이 새삼스레 뭉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첨단의료복합단지'니 '의료관광특구'니 하는 요란스러운 오색의 기치를 내걸고서 온통 '의료산업선진화'의 고가도로를 세우자는 아우성 속에서 말이다.

"나 전에 옛사람에게서 이렇게 들었다. 말이 달릴 때 필요한 땅은 말발굽 닿는 면적만큼만 필요하다. 그러나 그 면적만 남기고 나머지는 벼랑을 만들어도 말은 달릴 수 있나."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진 백무산의「살아있는 길」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그리고는 "발굽만큼 남은 땅을 길이라 하는 거냐. 말이 유기물인 만큼 길은 연속적이다. 밟지 않은 곳, 남겨진 그곳,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지는 곳은 그곳인데」라고 마무리된다.

최첨단의 대형 엔진을 달고서 선진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성능과 안전은 역설적이게도 그에 걸맞은 브레이크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보장되는 것이다. 제동장치가 풀린 고속 자동차는 차라리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포장된 흉기일 뿐이다. '인도주의 실천'이란 결국 사회의 응달진 갓길에다 풀을 키우고 꽃을 피워보려는 작은 안간힘일 뿐이다. 안팎으로 매서운 바람과 단말마의 신음 소리로 우리네 응달만 자꾸 깊어지고 짙어진다. 호시우행(虎視牛行), 애초에 스스로 가려던 길은 범 눈깔로 지켜가되, 걸음만큼은 황소걸음으로 이웃들과 더불어 걸어가는 새해 새날이기를 꿈꾸어 본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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