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주먹밥 같은 눈 덩어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애초에 편 같은 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곧 적이었다. 아이들은 눈을 던지고, 또 눈을 맞으면서 서로 뒹굴었다.
순덕이와 봉구는 전봇대 뒤로 몸을 감췄다.
"봉구야. 넌 아직 어리니까 내 뒤에 찰싹 붙어 있어야 해. 알았지?"
"응. 근데 우린 왜 숨어 있는 거야?"
"이게 다 작전이야. 여기에 이렇게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는 거지. 엇, 누가 온다! 쉿!"
순덕이의 등 뒤로 대식이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순덕이는 한 손으로 봉구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론 차가운 눈을 움켜잡았다.
'조금만 더!'
순덕이는 콩닥콩닥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격 준비를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대식이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순덕이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셋에 눈을 던질 작정이었다.
'하나, 둘…….'
막 눈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바보들! 다 보여, 인마. 그것도 숨은 거냐? 키키킥."
대식이는 순덕이의 작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순덕이는 그만 들고 있던 눈덩이를 손에서 놓쳐 버렸다.
"이거나 먹어라!"
순덕이가 주춤하는 사이 대식이가 먼저 공격을 했다. 눈으로 만든 대포알이 순덕이와 봉구를 향해 날아왔다. 당황한 순덕이와 봉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포알은 정확히 봉구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봉구는 울상이 되었다.
"키키키, 바보들아. 역시 너흰 내 상대가 안 돼."
대식이는 의기양양하게 순덕이와 봉구를 비웃은 뒤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순덕이는 심술이 났다. 능구렁이 같은 대식이가 너무 얄미웠다. 봉구는 순덕이 옆에서 눈 범벅이 된 옷을 탁탁 털고 있었다.
"봉구야. 저리 가자."
순덕이는 봉구의 손을 낚아챘다.
"왜 그래? 형."
"복수해야 할 거 아니야. 대식이 놈한텐 절대 질 수 없어!"
순덕이는 씩씩대면서 근처 놀이터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꼬마들에게 갔다. 봉구도 순덕이를 따라서 같이 씩씩거렸다. 코를 벌름거리는 모습이 꼭 싸움소 같았다.
"나 이거 잠시만 빌려 줄 수 있어? 금방 돌려줄게."
순덕이는 눈사람 모자로 사용된 은빛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봉구는 순덕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빨리 돌려줘야 해."
"알았어. 조금만 쓰면 돼."
양동이를 빌린 순덕이는 근처에 있는 눈을 모아 양동이에 가득가득 담았다.
"봉구야. 이 많은 눈을 다 맞으면 엄청 약 오르겠지? 내가 대식이 녀석을 꼼짝 못하게 뒤에서 붙잡을게. 그런 다음 내가 신호를 보내면 네가 양동이에 있는 눈을 대식이한테 몽땅 부어 버리는 거야. 알겠지? 실수하면 안 돼."
"키키, 생각만 해도 쌤통이다. 형."
순덕이와 봉구는 양동이를 들고 대식이를 찾아 나섰다. 눈이 빵빵하게 담긴 양동이가 꽤나 푸짐하게 보였다.
대식이는 공터 오르막에서 종이 박스로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곳은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서 썰매를 타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대식이는 한창 썰매에 정신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 기회야.'
순덕이는 천천히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식이 뒤쪽으로 다가갔다. 봉구는 양동이를 부여잡고 순덕이가 보내올 신호만 숨죽이며 기다렸다.
아무도 모르게 대식이 바로 뒤에까지 간 순덕이는 대식이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겁먹은 대식이는 유리 안에 갇힌 새처럼 온몸을 비틀며 허둥지둥했다. 순덕이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뽕구야! 지금이야, 뽕구야!"
순덕이가 신호를 보내자 봉구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대식이에게 눈을 퍼부었다.
"받아랏! 정의의 심판이다!"
"으앙! 그만, 그만해."
대식이의 옷 사이사이로 눈이 한 움큼씩 들어갔다. 금방 옷이 축축해졌다.
"너희들 다음에 두고 봐!"
대식이는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순덕이와 봉구는 달아나는 대식이의 꽁무니를 능글맞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 속이 다 시원하다. 크큭."
"나도 그래. 크크크"
봉구는 순덕이를 잘 따랐다. 둘이 형제는 아니었지만 형제만큼이나 친했다.
순덕이 집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과 부엌이 따로 붙어 있고, 마루로 통하는 문 외에도 바깥으로 나가는 뒷문이 있는 집 안의 작은 집 같은 방이었다. 봉구네 가족은 그 방에 세 들어 살았다.
순덕이는 봉구가 온 후부터 엄마한테 동생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봉구를 친동생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봉구도 그런 순덕이의 마음을 아는지 하루 종일 순덕이 뒤를 따라다녔다.
순덕이와 봉구가 눈에 별이 아른거릴 정도로 좋아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붕어빵이다. 둘이는 틈만 나면 학교 앞 골목길에서 장사를 하는 붕어빵 아저씨 근처를 서성거렸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 언제나 달콤한 팥 냄새가 코를 즐겁게 했다.
"봉구야, 돈 가진 거 있어?"
"없어."
"나도 없는데……. 흠, 그렇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군."
"어떤 방법?"
"우선 따라와. 형이 붕어빵 먹게 해 줄게."
"정말?"
붕어빵을 먹게 해 준다는 순덕이의 말에 봉구는 벌써부터 침을 줄줄 흘렸다.
순덕이는 봉구를 데리고 붕어빵 장수 코앞까지 갔다. 노랗게 잘 익은 붕어빵 여러 개가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었다.
"붕어빵 사러 왔냐? 얼마 치 줄까?"
능숙하게 붕어빵을 굽던 아저씨가 잠시 일을 멈췄다.
"저흰 돈이 없어요."
순덕이 처량한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얼음 같은 겨울바람 때문에 코에서 콧물이 주르륵 새고 있었지만 순덕이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일부러 어깨에도 힘을 빼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얘는 이틀 동안 밥을 굶었어요."
순덕이는 손가락으로 봉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전 사흘 동안 굶었고요. 그래서 우린 둘 다 몹시 배가 고파요. 이 붕어빵 한 개만 먹으면 정말 좋을 텐데……. 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붕어빵을 먹을 수 없겠지요? 아저씨, 우린 가난해서 붕어빵을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어요. 붕어빵은 어떤 맛인가요? 눈깔사탕보다 맛있나요? 고구마보다 달아요?"
붕어빵 아저씨의 입이 벌어진 밤송이처럼 되었다. 아저씨는 장갑을 벗고 순덕이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옜다, 요 녀석아. 이것 너 먹어라. 하하하."
갓 구운 뚱뚱한 붕어빵 두 개가 순덕이와 봉구 앞에 떨어졌다. 둘은 허겁지겁 붕어빵을 물어뜯었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터져 나오는 팥의 달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오늘만이다. 다음부턴 이러면 안 돼. 아저씨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야, 욘석들아. 하하하."
하지만 그 후로도 순덕이와 봉구는 여러 번 붕어빵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참 마음씨가 넉넉한 아저씨였다.
겨울은 하늘과 땅 사이에 거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무가 살을 다 발라 먹은 생선 뼈다귀처럼 변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아이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 눈싸움, 크리스마스, 설날, 겨울은 아이들에게 과자가 한 아름 들어 있는 선물 상자와 같았다.
동네 아이들에게서 딱지를 엄청 많이 딴 날이었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온 순덕이는 마당 가운데서 멈춰 섰다. 봉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봉구야, 왜 이러고 있어?"
"형, 우리 엄마하고 아빠하고 싸워."
"응?"
봉구네 엄마 아빠가 티격태격하는 것 같았다. 봉구는 아무 말 없이 땅만 쳐다봤다.
순덕이는 봉구를 위로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딱지를 반 나눠 주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기운 없는 봉구를 보니 순덕이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순덕이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쌀독 뒤에 마른오징어를 숨겨 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순덕이는 재빨리 마른오징어를 품에 넣었다.
"자, 이것 봐라."
순덕이는 엄마 몰래 가지고 나온 마른오징어를 봉구에게 내밀었다. 봉구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짭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끝내 줄 거야."
둘은 집 뒤편에 있는 연탄아궁이로 갔다. 집게로 아궁이 뚜껑을 연 것은 순덕이었다. 매콤한 연기가 뿜어져 올라왔다.
"아, 좋다. 난 모기차가 뿌리는 하얀 연기 냄새하고 연탄 냄새가 제일 좋더라."
"나도 그래, 형."
순덕이는 마른오징어를 발갛게 달아오른 연탄 위에 살포시 올렸다. 지글지글 소리가 나면서 마른오징어가 꼬불꼬불하게 말려들어갔다.
"왜 저렇게 꼬부라지지?"
봉구가 물어봤지만 순덕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순덕이도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둘은 몸을 배배 꼬면서 잠시 동안 웃었다. 그러는 사이 봉구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순덕이가 오징어 다리를 뜯어서 봉구 입에 넣어 주었다. 봉구는 다람쥐처럼 오물오물 맛있게도 받아먹었다. 짭조름한 그 맛에 정신이 팔려 순덕이와 봉구는 마른오징어 한 마리를 다 먹어치우기 전까지 입가에 그을음이 묻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형, 입이 까매. 꼭 깜둥이 같아. 키키킥."
"넌 부시맨 같아, 인마. 큭큭."
뒤늦게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을 알아차린 순덕이와 봉구는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웃어 댔다.
그해 겨울, 봉구네 엄마 아빠는 몇 번 더 싸움을 벌였다. 제법 소란스러운 적도 있었다. 싸움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봉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걸 달래는 건 순덕이의 몫이었다.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 건 추위가 약간 누그러졌다 싶을 때였다.
"형! 우리 이사 간대. 엄청 큰 집으로 가는 거래. 거기 가면 마당도 넓고, 내 방도 있대. 근사하지?"
봉구는 얼마나 들떴는지 불그스름한 얼굴로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이사? 언제 가는데?"
"몰라. 아무튼 엄마가 그랬어. 좋은 집으로 이사 간다고. 히히히."
한껏 신이 난 봉구하곤 달리 순덕이는 썩 내키지 않는 기분이었다. 봉구와의 헤어짐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봄이 오기도 전에 봉구네 가족은 이사를 갔다. 순덕이의 생각보다 이별이 한 발짝 앞서서 다가온 것이다.
아침 일찍 이삿짐을 나르는 트럭이 왔다. 순덕이는 눈곱도 떼지 않고서 밖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봉구네 가족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봉구네는 좋겠네. 좋은 집으로 간다며? 잘 살어. 보고 싶을 거야."
"에휴, 봉구야. 꼭 놀러와야 한다.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알았지?"
동네 아줌마들은 모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중에서 가장 섭섭한 기색을 내비쳤던 사람은 순덕이네 엄마였다.
"봉구 엄마, 잘 살어. 혹시라도 뭐 나한테 아쉬웠던 것 있으면 다 털어 버리고……."
순덕이와 봉구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봉구야, 형이 방학하면 놀러갈게. 잘 지내야 해."
"응, 꼭 놀러와. 놀러오면 내 방 구경시켜 줄게. 형도 잘 지내."
봉구네 가족은 둥지를 떠나는 제비처럼 그렇게 가 버렸다.
순덕이는 텅텅 비어 있는 집 안의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봉구네 가족이 항상 눕던 그 자리에 이번엔 순덕이가 엎드려 누웠다. 찬 기운이 볼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순덕이는 자신의 입김으로 바닥이 따스하게 더워질 때까지 계속 누워 있었다. 꽃이 피면 새로운 손님이 그 방으로 들어올 터였다.
-끝-
▲ 당선 소감
아이들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읽어 나가는 그 목소리, 웃었다 찡그렸다 수시로 변하는 표정, 한군데 가만있지 못하고 침대로 갔다 책상으로 갔다 하는 산만한 모습까지, 아이들의 책 읽는 모습은 항상 생기가 넘칩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신이 납니다. 이 때문에 제가 동화를 쓰고 있나 봅니다.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기분입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세상은 웃음과 기쁨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기분대로라면 누가 제 밥그릇을 빼앗아 가더라도, "한 그릇 더 드릴까요?" 하면서 넉살 좋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선을 알려 준 전화기마저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철없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노트북을 열어 여태까지 제가 써 놓은 글들을 하나하나씩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아직 고치고, 배워야할 점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갓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의 심정으로 모든 것을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 전 목표를 이룬 것이 아니라,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끝으로 옆에서 항시 다정하게 저를 지켜봐 준 아버지 어머니 형님, 늘 제 걱정뿐이신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제 등을 떠밀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누구나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놀이터의 의자와 같은 동화를 쓰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홍우주
▷ 1986년 경북 문경 출생
▷ 경북대 사범대학 윤리교육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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