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매화에 물을 주자

입력 2008-12-31 10:48:46

지금 제 책상에는 탁상용 새해 캘린더가 없습니다. 연말이면 경쟁하듯 쏟아져 나온 홍보용 스탠드 달력을 올해는 어째 하나도 얻어걸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천 원만 주면 문구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전대미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 위기가 닥쳐왔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납니다.

새해를 맞는 감회야 매년 남다르지만 지난 무자년은 무지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12월이면 '97년 외환위기'를 다시는 겪지 말자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습니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11년 만에 당시 위기를 능가한다는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고통이 倍加(배가)될 수밖에 없겠지요.

다소 억울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때야 우리네 잘못으로 자초한 위기지만 지금은 숫제 남의 잘못으로 야기된 위기를 덩달아 떠안고 있으니 '약소국의 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최상의 모델인 줄 알고 정신없이 뒤쫓아 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허점투성이였고, 이제는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판국이 됐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세계화'로 중무장한 현재의 자본주의 논리를 거부할 힘도 능력도 없으니 글로벌 위기를 공유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번 위기는 일을 저질러 놓은 친구들이 일어서야만 우리도 함께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나긴 위기의 초입에 불과하다고 하니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 새해 기축년을 맞아 덕담을 나눌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줄곧 얻어터지면서도 5천 년 역사를 지켜온 한민족 아닙니까. 지난 외환위기 때도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런 민족입니다. 그 민족정신의 한가운데에는 늘 매화가 있었습니다.

겨울이 길고 추울수록 매화 향기는 짙어집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은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이라고 했습니다.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매화 향기를 어찌 돈으로 사고팔 수 있겠습니까만 좋은 향기를 금전으로 거래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지요. 매화를 유달리 사랑했던 퇴계 이황은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하신 마지막 유언도 "저 매화에 물을 주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살랑살랑 미풍 기다릴 것도 없이/ 온 집안에 맑은 향기 절로 가득하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율곡 이이도 빠질 수 없지요. '매화는 본디부터 환히 밝은데/ 달빛 비치니 물결 같구나/ 매화꽃 마주보며 마음 씻으니/ 오늘밤엔 한점 찌꺼기도 없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3絶(절)의 한 사람인 강희안은 화목을 9등품으로 나누었는데 당연히 매화를 1품에 분류했습니다.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의연히 꽃을 피운 매화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매화 향기가 조금 느껴지십니까. 새해 벽두부터 忍苦(인고)의 상징인 매화 얘기를 꺼내자니 마음이 무겁습니다만 우리 곁엔 항상 매화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빠뜨릴 뻔했습니다. 매화의 결정판이 있습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시를 뿌려라.' 이육사의 '광야'입니다.

尹柱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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