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격변을 겪었다. 10년 만에 집권한 보수정권은 총선을 통해 절대다수의 의회권력까지 획득했으나 '큰 정치'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모든 국민의 가슴에 분노와 혼돈, 그리고 불안의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금융위기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우리 생활을 총체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매일신문은 2009년 새해를 맞아 직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과 시대적 화두가 된 국민통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시대 보수와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원로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과 중진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에게서 새해를 밝히는 지혜를 찾아보았다.
● MB정부와 노무현 전 정부 평가
-이명박 정부 1년을 평가하면?
"경제회복이라는 국민적 기대 속에 출범했지만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세계경제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경제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 이전에 정치를 먼저 회복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이 국민들을 이념적으로 분열(잘사는 사람 20%, 못 사는 사람 80%)시켰고 따라서 새 정부에서는 국민통합이 필요한데도 이에 대한 조치가 없었다.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한나라당내 단결이 필요했으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공조에 소홀했고, 내각을 구성하고 청와대 참모를 발탁할 때 전문성은 몰라도 국민 대표성은 고려되지 못했다. 또 야당과의 정책협력에도 실패했다. 국민통합 실패에 따른 총체적 결과가 광우병 파동이었다."
-국민통합 실패 책임이 야당이나 박 전 대표에게는 없는가?
"민주주의는 독립적 권력 간의 연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러한 관습·관행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국민통합에 앞장을 서서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대통령의 책임이다. 이 대통령에게 분열의 책임은 없지만 통합하지 못한 책임은 있다고 본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책임을 따지자면?
"8대 2로 이 대통령의 책임이 압도적이다. 이 대통령이 '손을 잡느냐 안 잡느냐' 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만큼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여름에 박 전 대표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의외로 열려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두 사람이 손잡는 것이 국민통합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에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광우병 파동이다. 사회적 파장이 엄청나게 컸음에도 불구하고, 광우병이란 실체가 전혀 없으므로 왜 그러한 운동을 해야 했는지 운동에 참여한 사람 스스로도 그 의미를 모를 것이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는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민중항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장장 3개월간에 걸친 시민저항의 사상성은 전무하다. 이러한 광우병 파동의 사상적 공허성이 앞으로 무목적적인 시민저항을 어렵게 했다는 점에서 이번의 광우병 파동은 국민에게 엄청난 교훈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한번 자성해 봐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광우병 위험이 국민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된 후 몇십년 동안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일종의 국민정서가 문제다. 미국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은 가운데 이명박 정부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수입협상을 한 게 국민정서를 건드렸다는 일부 언론의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민 간의 이념분열(보수·진보)이 그 배후에 있지 않은가 판단된다."
-정부가 국가적 SOC사업, 4대 강 정비계획을 발표하며 경제살리기에 나섰다. 경제학자로서 정부의 인위적 개입이 경기부양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그동안 실물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은 금융활동으로 세계경제에 거품이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래와 다른 특단의 대책, 즉 새로운 금융질서를 확립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국가 간의 통화 스와프, 세계은행의 강화나 지역은행의 설립 등이 좋은 예다. 1, 2년 후에는 세계경제가 새로운 질서를 찾을 것으로 본다.
국내적으로 토목·건설은 고용과 수요증대에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4대 강 정비는 해마다 막대한 피해를 내는 홍수 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4대 강 정비라는 것이 한반도 대운하냐 아니냐 논쟁이 붙고 있는데 대운하는 아니라고 본다."
-'노무현 정부는 방향을 잃어버린 무능한 건달정부'라고 평가했는데?
"말이 가혹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경제는 국제협력노선이라야 제대로 나갈 수 있다. 햇볕정책은 기본적으로 자주노선이다. '우리끼리'라는 것은 국제협력노선을 배제하는 것이다. 김정일과 우리끼리 해서 될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다."
●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은?
-대한민국이 성취한 것은 무엇이며 성취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은?
"선진문물을 흡수하는 능력은 뛰어나고 이러한 부분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선진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나름의 문화를 가져야 하는데, 이건 쉽지 않다. 더구나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어 정비 등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 창달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가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6% 경제성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했는데, 가능한 수치라고 보나?
"가능하다.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국정방향이 궤도에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의 잠재적인 경제성장률은 4% 정도다. 나머지는 외국기업의 투자유치 등 외국의 잠재력을 활용하면 된다."
-한국 경제성장은 무역·개방에 힘입었다고 했다. 작금의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보다시피 개방된 하나의 지구촌 경제는 그 역작용도 만만찮은 것 같다. 특히 개도국들의 고통이 더 커서 세계화의 희생양이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글로벌로 만들어진 경제다.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으로 적극적인 외국 자본과 기술의 유입으로 공업화를 추진해왔는데, 이러한 외향적 공업화정책은 한국경제 체질상 불가피했다. 우리 경제규모가 이제 세계 10위권이다. 세계경제에 주는 영향도 커졌으므로 세계경제와 상부상조해야지 세계경제에 의존만 하려고 하거나 혜택만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 지방이 살 길은?
-선진화정책과 대한민국 수도권-비수도권 균형발전과의 상관관계는? MB노믹스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으로 돈·사람·기업이 모이는 허브를 만든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수도권 집중정책 아닌가?
"수도권 집중은 세계적인 추세다. 특히 한국경제는 국제협력을 통해 대도시가 먼저 발전하고 시골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쳤다.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지방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수도권으로 교육이 집중화하는데 대해 비수도권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어떻게 고급 정보에 먼저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므로 수도권 집중이 커다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 대책으로 지방교육육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우고 지방개발을 위한 과감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
-규제완화가 이뤄진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다. 수도권 규제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도권 규제로 지방을 살리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수도권에서 밀려난 산업이 지방으로 이전하지 않고 해외로 유출된다. 이를 직시해야 한다."
● 사상과 행동에서 화제를 뿌리고 있는데?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직 수락으로 MB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평을 들었다. 좌우 통합을 위해 정치·정권 차원을 넘어선 초당파적 역할을 기대한 이들은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런 평을 듣는 것은 내 책임이다. 대선 당시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MB의 이데올로그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의 사상이나 철학이 현 정부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단 1%도 없기 때문이다. 장식품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대통령에 당선되면 반드시 박 전 대표가 필요하다고 간곡히 충고했지만 박 전 대표를 끌어안지 못했고 결국 국민통합에 실패했다."
-일본 제국이 조선에 근대를 이식했다고 한 일제 강점기 평가에 대해 많은 반발을 사고 있는데?
"국제 협력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 선진국의 문물이 후진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착취도 있지만 근대적 변화도 있다. 이것이 근현대 세계사의 흐름이다."
-'위안부는 자발적이었고,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라고 했다는데 진의냐?
"위안부를 일본 국가권력이 강제 동원했다는 자료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증언자가 있을 뿐인데, 이것은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강제 동원 증거가 없다고 해서 자발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강제와 자발 사이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중간항이 있다. 한국에는 아직도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하는데, 이들이 강제동원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자발적이라 말할 수 있나. 그들에게는 수많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대담·이상훈 편집부국장 기록·최창희기자
1936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부산공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과 교수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근대 경제사의 한 기둥을 세웠다. 마우쩌둥 이론을 응용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대표적 진보학자로 자리매김했으나 중진자본주의론, 캐치업이론을 내세우며 우파로 변신했다. 2006년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했으며 대통령선거를 앞둔 2007년 9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지금은 뉴라이트재단의 후신인 사단법인 '시대정신'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변신한 우파' '뉴라이트 그룹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역사의 격랑 속에서 한국사회 도약을 위해 행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찬사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를 미화하는, 사상적 변절자"라는 비난까지 한몸에 받고 있다.
'하루 일을 하고 하루 밥을 먹는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으며, 운전은 안 하고 골프는 치지 않는다. 칠순을 넘긴 지금도 전국을 돌며 강연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과 매주 한두 차례 등산하는 것을 건강법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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