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몰락의 전조이자 기회의 씨앗이란 두 얼굴이다. 위기에 몰락하는 경우도 많지만 거꾸로 도약의 계기가 된 경우도 많다. 위기에 닥쳤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공포에 빠지는 것이다. 공포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위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실체 이상으로 과장되기 쉽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약했던 개인이나 집단의 공통점은 공포에 지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포를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극복방안이 나온다.
서기 589년 선비족 국가인 北周(북주) 출신의 양견(문제)이 세운 隋(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다. 후한 멸망(220)으로 분열시대에 빠진 후 360여년 만의 통일이었다. 수 문제의 중원 통일은 고구려의 위기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支那(지나:중국)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에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각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채호의 말대로 중원이 통일됐으니 충돌이 불가피했다. '隋書(수서)' 고구려전은 "開皇(개황:수 문제의 연호) 초에는 入朝(입조)하는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陳(진)을 평정한 뒤로는 湯(탕:평원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왜 중원의 통일제국과 충돌해야 했을까? 광개토태왕비는 시조 추모왕에 대해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하백)의 따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는 천제의 아들, 곧 天子(천자)가 세운 국가였다. 실제로도 휘하에 말갈과 거란 등을 거느린 천자국이었다. 그러니 중원의 천자국과 충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원왕이 수 통일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영양왕(590∼618)이 즉위했다. 전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국왕이 교체된 것도 고구려의 위기였다.
수 문제는 영양왕 8년(597)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영양왕을 협박했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훗날의 여진족)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禁錮(금고)시켰다"는 것이다. 말갈과 거란 등을 수나라에 바치지 않고 계속 천자국 행세를 한다는 비판이었다. 수 문제의 국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남방의 陳(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처럼 군사를 보내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으로 끝을 맺었다. 수 문제의 국서에 고구려는 경악하고 공포에 빠졌다. 이에 대해 영양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영양왕은 놀랍게도 수나라를 선제공격했다. 수 문제가 협박하는 국서를 보낸 이듬해(598) 말갈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遼河(요하)를 건너 수나라 遼西(요서) 지방을 공격했던 것이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수 문제는 즉각 30만 대군을 보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무모해보이지만 잘 계산된 것이었다. 어차피 싸울 전쟁이라면 싸울 시기와 장소를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국왕과 귀족들이 서로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선제공격으로 세계 최강 수나라가 침략할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고구려는 전력을 하나로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점에는 당연히 국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양왕은 어차피 싸울 전쟁이라면 국내를 전시체제로 정비한 후에 싸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하나 영양왕은 수나라의 자만심을 역이용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수 문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즉각 30만 군사를 보냈다. 상대가 왜 선제공격을 했는지 면밀히 검토하는 대신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군사를 보낸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隋書(수서)'는 장마와 전염병 때문에 군사의 10의 8, 9가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관들의 왜곡이고 실제는 고구려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전멸당한 것이다.
영양왕은 수나라라는 거대한 공포를 객관화했다. 대국의 자만심을 전략에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세계 최강 수나라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영양왕 같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지혜와 용기가 있다면 위기는 얼마든지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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