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성주 독용산성.한개마을

입력 2008-12-25 06:00:00

참외로 널리 알려진 경북 성주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가야산을 끼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할 뿐 아니라 걸출한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많아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고 깃든 정신 또한 깊다. 대구에서 가까워 나들이 하기에도 부담이 적다. 성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적 가운데 독용산성과 한개마을을 둘러보았다.

◆독용산성(禿用山城)

해발 955m 독용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성 안에 계곡을 두고 800m 독용산 능선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봉두리, 무학리, 영천리에 걸쳐 있다. 영남지방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둘레가 7.7km(평균 높이 2.5m, 폭 넓이 1.5m)에 이른다.

축조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4세기경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깨뜨려 쌓았다. 아랫부분에 큰 돌을 깔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을 흩어쌓기식으로 쌓았으며 사이 사이에 잔돌 끼움을 하여 성벽의 틈새를 메웠다. 성 안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의 성문터와 수구, 포루·망루·객사·군기고·창고 등이 있었던 건물터, 연못터, 우물터, 계곡 등이 남아 있다.

독용산성은 성산가야 멸망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활용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을 피해 산으로 오르던 백성들이 발견했으며 임진왜란 때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다. 임진왜란 후 경상북도 병마절도사에 예속된 병영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숙종 원년 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했다. 일제 강점기 발굴조사한 군기고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됐다. 조선 말기 군사적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이 많이 허물어졌다. 최근 복원된 성곽 일부와 동문을 제외하면 당시 모습을 찾기 어렵다.

등산을 하려면 성주댐 수문 아래 중산마을을 통해 올라 가야 한다. 차를 이용하면 대구~성주~가천면소재지~신계리 방면으로 접어들면 독용산성을 알리는 푯말이 나온다.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독용산성으로 오르는 임도(6.2km)가 모습을 드러낸다. 임도는 차 한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지만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운전하기 수월하다.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굽이 돌 때마다 빼어난 조망이 펼쳐진다. 첩첩이 겹친 가야산 준령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멀어지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작은 집들이 점점히 흩어져 있다. 성주댐이 오른쪽 발아래 나타나 시원한 자태를 뽐내면 저 멀리 성문이 보인다. 앙상한 몸을 드러낸 나무들이 겨울의 한 가운데를 알리고 응달에 잔설이 남아 있는 길을 조금 더 재촉하면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를 세우고 바싹 마른 낙엽을 밟으며 흙길을 따라가면 이내 동문루와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동문루를 통해 산성안으로 들어가면 별장박시연선정비, 별장장천학불망미 등이 방문객을 맞는다. 복원된 성곽을 타고 독용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성주군청에서 파견한 산불감시원에 따르면 멀미가 날 것 같은 단풍이 온 산을 곱게 물들일 때, 산나물이 나는 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개마을

5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성산 이씨 집성촌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마을 뒤쪽에 영취산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앞쪽에는 백천이 흘러 옛날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 중 하나로 꼽혔다. 한개라는 지명은 크다는 뜻의 한과 나루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로 예전 백천에 있던 나루이름에서 유래했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은 이름난 선비와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으로 평생 절의를 지킨 이석문, 조선 말기 성주를 빛낸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이원조와 성리학자로 유명했던 이진상,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희 등이 한개마을 출신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고택에는 이들의 자취가 스려있다.

관광안내소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 길을 조금 올라가면 진사댁이 나온다. 진사댁을 중심으로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길로 접어들면 교리댁(경상북도 민속자료 43호), 북비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44호), 월곡댁(경상북도 민속자료 46호)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교리댁은 영조 36년(1760)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한 이석구가 지었다. 집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데서 유래했다.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 배치돼 있다. ―자형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돼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튼ㅁ자형은 한개마을 고택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으로 태백산맥 일대 ㅁ자형과 남부 ―자형 민가를 섞은 놓은 배치 형식으로 민가 유형의 지역적 전파, 교류, 절충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교리댁에 들어서면 세월의 무게만큼 기울어져 있는 탱자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오랜 세월 집안을 지켜온 탱자나무는 이제 늙고 지쳐 지지대에 의지한 채 45도로 기울어져 있다.

북비고택은 이석문이 영조 50년(1774년) 사도세자를 사립문을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매일 새벽 사도세자 묘를 향해 재배를 올린 곳이다. 북비(北扉)는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풍스런 고택과 함께 한개마을에서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돌담길이다. 황토흙 사이 사이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군데군데 박아 쌓은 토석담은 정겨운 고향길을 연상시킨다. 돌담길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오른쪽길이 제격이다. 해묵은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돌담길 따라 하회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26호), 극와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54호), 도동댁(경상북도 민속자료 132호), 한주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45호) 등 유서깊은 고택들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하회댁은 한개마을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양반 주택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주종택은 영조 43년(1767) 이민검이 세웠으며 고종 3년(1866) 이진상이 새로 고쳐 지은 후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정자가 있는 구역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정자로 들어가는 대문은 남향,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정자와 안채를 구분하는 담을 두고 협문 등을 내어 출입하게 했다. 안채는 한개마을 안채 중 가장 온전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구~성주~김천·초전 방면~한개마을이 나온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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