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직후인 1991년 1월 베를린에서의 기억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군데군데 허물어낸 장벽이나 브란덴부르크 문,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된 채 남은 네오르네상스식의 카이저 빌헬름 2세 기념교회도 아니었다. 번화가인 쿠담거리에서 본 간판이었다. 차분하고 절제된 미의식 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늘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변공간에 대한 독일인들의 책임감이었다. 사람을 위한, 공간에 대한 배려였다.
유럽 도시의 건물에 달린 간판이나 거리표지판, 전광판은 우리와 판이하다. 눈에 띄게 한다고 건물을 가릴 정도로 크기를 키우고 요란한 원색을 뒤섞어 조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뉴스 전광판도 회색과 같은 중간 색조를 사용해 보행자들에게 토막뉴스를 전달하는 게 전부다. 물론 상업용 건물의 경우 업소마다 2개 내지 3개씩 간판을 달 수 있도록 법규나 판례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업소마다 1개밖에 설치하지 못한다. 허가를 안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같으면 법에 규정돼 있는데 왜 허가를 안 해주느냐고 멱살잡이하고 난리 났을 게다. 또한 간판마다 매년 세금을 내야 한다. 간판세다. 자연히 세금 무서워 간판 함부로 달지 못한다.
정부가 어제 지방재정 확충을 위해 간판세'온천수세 등 지방세 세목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옥외간판 등에 일정 수준의 간판세를 매기겠다는 것이다. 세수도 늘리고 무분별한 간판도 정비해볼 요량이다. 하지만 간판세를 도입해 세금을 물린다고 치자. 세금 겁나서 간판 못 달겠다는 업주는 없을 게 분명하다. 민원이 귀찮다고 손 놓고 있는 공무원이나 도시 미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간판을 달아대는 업주들이 존재하는 한 지금과 별반 차이 없을 것이다. 동성로 통신골목을 뒤덮은 대형간판 정비 사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법이나 규제, 세금이 아니다. 스스로 절제하고 조화를 맞추는 배려와 미덕, 미의식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간판은 도시의 얼굴이자 문화다.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공공의식의 결과물이다. 한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가장 좋은 척도는 간판을 보면 안다. 어지러운 간판 때문에 매일 스트레스 받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이제는 건물을 간판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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