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독민들 훈련…삼국통일 전초기지로
대구에서 경산을 오가는 시내버스 중 449번'649번'909번 종점이 있는 경산 압량면 금구동. 이 일대는 BC108년~AD300년(?)사이 약 400년간 번영했던 고대국가인 압독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압독국은 당시 신흥국가로 발돋움 하던 신라의 등살에 못 견디면서 102년 신라 파사왕 시기부터 조금씩 합병되기 시작, 300년 경 유례왕 때 완전히 병합된다. 명칭도 압량주로 바뀐다. 압량주는 백제와 가장 가까게 접해 있으면서 도읍을 감싼 높고 낮은 산들이 자연 성곽형태를 이루고 동서로 길게 뻗은 금호강을 중심으로 기름진 농토가 많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김유신 편'에 따르면 신라 조정은 이곳을 중요한 군사기지로 판단, 대규모 군사훈련장을 압량지역으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638년 김유신을 압량(押粱)주의 군주로 파견한다. 하지만 압독인들은 여전히 신라를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어 그 저항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신라와 백제는 밀고 당기는 혈전이 계속됐다. 이에 김유신은 허허실실의 기지와 회유정책을 발휘, 마침내 민심을 얻고 압독인들의 민병조직마저 신라 정예군으로 편입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부터 압량면의 압량리와 부적리 일대는 김유신을 중심으로 삼국통일을 위한 전초기지가 된다.
안내를 맡은 경산시립박물관 김종국(59) 관장과 먼저 찾은 곳은 사적 218호인 압량리 두룩산에 있는 김유신화랑훈련장. 약 4천300평 규모의 훈련장은 토성모양의 축조물로 한 켠에 흙을 높이 쌓은 지휘소를 중심으로 원형의 구릉지다. 둥근 원(圓)은 신라의 강력한 국방의 원동력이었던 화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훈련장은 이곳을 중심으로 압량 내리와 진량 선화리 두 곳에 더 있다. 두룩산 훈련장은 기마병, 내리는 궁술 연습, 선화리는 보병 훈련장으로 각각 1.2~3.2km씩 떨어져 있으며 지휘소에서 보면 한 눈에 전체 훈련 상황을 둘러볼 수 있도록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두룩산에서 기마훈련에 임하던 기마병들은 지금의 준사관급으로 인근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압독민 장정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장정의 아낙네들은 늘 불안한 마음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와의 접근지대에서 언제 전장으로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지아비나 아들의 말을 관리하는 몫은 아내요 어머니들이었다. 이에 옛 압독국 여인들은 인근 못에서 말의 귀를 씻으며 출정하게 되면 '화살이며 창이며 적의 칼날이 날아오는 소리를 잘 듣고 피해 달라'며 무사귀환을 빌기도 했다. 그 못이 부적리 앞에 있는 '마이지(馬耳池)'이다. 부적리란 마을이름도 지아비들이 적진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지아비'부(夫)'에 나아갈'적(迪)'을 쓰고 있다. 현재 마이지 맞은편 압량리 일대는 택지개발이 한창이다.
마이지에서 하양 방면으로 조금 더 가면 압량교 아래로 하천이 흐른다. 내의 이름은 오목천(烏沐川). 위로는 KTX철도가 지나고 있다. 까마귀가 목욕을 하는 냇가라니. 뭔가 사연이 있을 듯싶다. 오목천은 경산의 동쪽 구룡산 계곡수가 발원지로 용성면 일대를 흘러내리는 오로천과 만나 금구리로 흘러가는데 옛날 수많은 까마귀가 냇가에 몰려 노니는 모습이 흡사 까마귀들이 목욕하는 형상이라고 해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는데 갑자기 왜구가 습격하자 때 아닌 까마귀 떼들이 진영을 에워싸고 울부짖어 군사들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또 급히 강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오목천이 흐르는 마지막 마을은 금구리로 가는 길은 버스종점에서 왼편 소로로 이어진다. 금구리는 오목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예부터 물이 자주 범람했던 곳. 비가 많이 내려 냇물이 넘치고 나면 항상 하천바닥의 모래가 위로 치솟아 작은 섬을 이뤘는데 모래의 황금빛 언덕이 마치 거북의 등처럼 보였다고 해서 마을이름이 금구(金龜)리가 됐다. 금구리는 현재 경산의 명물인 대추의 주산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이곳 벌판에서 김유신은 기마병의 도강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금구리에서 영남대 방향으로 있는 조영동 고분은 1987년 발굴 당시 임당고분군과 더불어 원삼국시대 무덤형태와 금동관 왕관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 이들 유물은 현재 경산시립박물관과 영남대박물관, 대구국립박물관 등에 고루 분산, 전시돼 있다.
비록 신라에 복속됐지만 1천 수백여년 전 경산 압량면 일대를 주무대로 활약했던 고대국가 압독국의 흔적은 이제 아파트 숲과 현재적인 건물들에 가려져 명맥만을 지탱해 가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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