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수기] 대상-장호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

입력 2008-12-09 09:38:24

▲ 장호(오른쪽)씨가 아내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장호(오른쪽)씨가 아내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매일신문사와 법무부가 주최한 '2008 전국 다문화가정 생활체험 수기 공모' 수상작 4편을 9일과 16일 2주에 걸쳐 싣습니다. 글쓴이의 마음과 현재 생활을 진솔하게 전달하기 위해 맞춤법 외에는 글의 첨삭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의 진실성 외에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과 문장의 완성도 역시 심사의 주요 항목이었습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엄마는 틀림없이 비행기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공항에서 아빠 품에 안겨 외아들을 한국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펑펑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 내몽고에서 소황제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 없이,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해방이다. 나만의 선택으로 뻗어진 성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한국 부산 해양대로 유학 오던 2003년 첫 날, 내 생에 최초로 바다라는 것을 보았다. 사막보다 광대하고 짙푸른 심연은 고향을 떠나길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선진 한국과 수년 뒤면 동문으로서 드나들 한국해양국립대학에서의 모습을 그리자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김해공항 근처의 삭막함은 내몽고의 시골과 다를 바 없고, 며칠을 걸어서 구경해야 교정을 다 볼 수 있는 중국의 대학교에 비한다면 해양대학교도 아주 작은 섬에 불과했다. 첫 날부터 무너진 기대. 그것도 잠시, 가나다도 모른 채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 나를 매섭게 내몰고 있었다.

중국재료들을 챙겨온 것이 있어서 기름과 우유만 있으면 대충 오늘의 끼니는 해결할 것 같았다. 마트에서 고민하며 사 온 기름은 뚜껑을 열자 식초였다. 논리적으로 점도가 높은 것으로 사 온 것이 물엿, 점원에게 오일(oil)을 수십 번 말하다 포기하고, 온 진열대를 다 훑고서야 겨우 기름을 샀다. 우유도 결국 카운터에서 가슴에서 우유를 짜는 젖소흉내를 내면서 수치스럽게 사와야만 했다. 마트에는 의외로 영어가 적혀있지 않거나,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해놓은 것들이 많아 아직도 외국인에겐 원하는 목록을 제대로 사오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어쨌든, 내몽고에서 하루 세 끼를 생고기를 먹다가, 기숙사 식판에 오른 서너 가지 반찬은 밥을 반만 먹어도 모자라기 일쑤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김치는 고약한 냄새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늘 배가 고팠다. 어떤 친구는 밥만 냄비에 퍼나가서 몰래 반찬을 만들어 먹다가 들켜 졸업할 때까지 '밥도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배에게 물어보고 외운 첫 번째 한국어 문장은 "배가 너무 고파요. 반찬 좀 많이 주세요."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위 공산당이다. 그래서 종교를 권유당한 적도, 믿으려고 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나도 종교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한국 온 둘째 날, 한국인 여대생이 한국어를 노래로 재미있게 가르쳐준다며 단체로 초청해서 간 곳이 바로 교회였다. 본능적으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활한국어를 빨리 터득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매주 교회라는 곳을 다니면서 중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관심과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사랑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선배들이 학기 초에 군기를 잡는다고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면서 후배들을 기선제압하고 있었다. 내몽고에서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라, 어릴 때부터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잠이 드는 문화여서 술이 센 편이었다. 한국의 대학은 술을 빼고는 어울릴 수 없는 듯 보였고, 술이 센 것이 은근히 자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술이 세다는 소문에 선배들은 자주 나를 불렀고, 이렇게 지난 1년 동안 배운 한국어는 교회의 종교언어와 술자리에서 배운 취중언어가 내 입에 배이게 되어버렸다.

날씨가 풀리면 해양대 앞바다에서 습관처럼 다이빙을 했다. 고향에서는 소독 냄새가 물씬 나는 수영장에서 밖에 할 수 없던 수영을, 학교가 섬이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진짜 파도와 해초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내겐 큰 매력이자 혜택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좋은 것만 부모님께 말하고 안 좋은 건 그냥 속으로 삼키면서 나도 모르는 새 철이 들고 있었다. 환율차가 컸기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 보다 젊은 내가 고생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고생스럽고 서럽더라도 참고 두 배로 성실하게 일했다. 매스컴을 통해 한국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의외로 중국인이라는 것 보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성실과 신의를 인정해주고 대우해주어 참 고마웠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돈을 번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학교 친구들이 존경하는 한국인이 있는데, 그 누나 집에 놀러가자고 했지만 왠지 쑥스러워 못 갔다. 그러다 드디어 2005년도 여름, 그 모임에서 MT가는데 슬쩍 따라나선 길이 운명의 길이 돼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친구들이 말했던 바로 '그 누나'는 친구들의 표현보다 훨씬 이상이었다. 인형 같은 외모, 일본어통역사로 잦은 해외출장과 경력을 갖고 있고, 요리도 잘하고, 착하고 친절하기가지 했다. 여동생과 함께 우리 사이에서 천사자매로 통했는데, 자주 우리를 불러 요리도 해주고, 함께 병원도 가주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해결해주고, 그리고 오랜 유학경험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유학생활을 적절한 위로와 격려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냥 중국인 친구들이 정이 간다고만 얘기했다. 그렇게 하는 누나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게는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절실히 필요한 사람으로 금세 자리 잡아 버렸다.

누나의 관심을 사기 위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말로만 해왔기 때문에 글로 쓸 때 맞춤법이 다 틀린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잘 보이기 위해 몇 줄의 메일을 쓰려고 몇 시간을 사전을 찾아가면서 수십 번이나 순서를 앞뒤로 바꿔가며 작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장은 매번 빨간색으로 빽빽하게 수정된 원문과 함께여서 정말 부끄러웠다. 한국어 작문을 밤새서 했다. 좋은 문구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맞춤법을 그때그때 고쳐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만나면서,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교제신청을 했다. 그러나 누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유는 내가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결혼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교회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한국어를 배우러 다녔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게 우리 교제가 불가능한 이유였다. 게다가 누나에게는 오래전 한국에 오자마자 교회에서 느꼈던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난 없었다. 그래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옮겨서 출석하기 시작했다. 영도 해양대에서 해운대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첫차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새벽기도부터 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누나를 감동시켜서 교제를 하기 위한 꿍꿍이였다.

누나의 마음도 서서히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장인장모가 될 분들을 만났는데, 절망하고 말았다! 완전 깡시골 부산사투리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식사 전에 "인자 묵짜, 니도 마이 무라"라든가, 짐을 들어드리고 나서 내게 "욕봤다"고 하시면서 등을 두드리시거나,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로 "니을 오요? 머라카노, 안 듣끼여?"라고 말하실 땐, 새로운 외국어같이 느껴져 정말 답답했다. 부모님에게도 점수를 따고 싶은데, 역시 외국인이라 말이 안 통해 힘들다는 말을 들을까봐 얼마나 촉수를 세우고 한마디 한마디 들었는지 모른다. 영화 친구를 보면서 사투리도 연습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누나가 길을 걸으면서 말하기에, 바람이 많이 불어 감기 걸릴까봐 "누나, 입 닥쳐요"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실전의 사투리는 수업 중 교수님의 사투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누나의 동생과는 친구로 만나서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았지만 그냥 중국에서 하던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한국은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기에 누나의 누나에게는 '누나님','형부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당시에는 웃기만 할 뿐 고쳐주지 않아 습관이 되어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누나의 동생도 여전히 이름으로.

2년 전 세례를 받고, 온갖 해프닝 끝에 크리스천이 되면서 누나와 결혼승낙에까지 갔다. 알고 보니, 누나도 나처럼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결혼이 어디 있을까! 결혼승낙만 받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혼서류가 산 너머 산이었고 소원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친부모님을 초청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혼인신고를 해야 했는데, 누나의 가족은 결혼도 하기 전에 절대로 먼저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고 하셔서, 우리는 중국을 바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결혼식 날짜는 잡혀있고 중국 부모님 없이 식을 올려야 할 판이었다. 울고불고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중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결혼예비학교'라는 것에 등록해서 남녀차를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들, 조화롭게 양가와 누리며 사는 방법들,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 된다"며 죽는 방법에 대해 함께 배우면서, 한국의 이런 좋은 세미나들을 중국에도 알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강사가 되고 싶을 만큼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혼수인 부부의 자질을 갖추어가면서 결혼준비를 했다. 한국은 제대로 갖추려고 하면 결혼식을 위한 절차도 너무 까다롭고 갖출 것도 많아서 누나와 고민 끝에 양가의 허락을 받아 생략하기로 했다. 모든 어려운 난관들을 누나와 같이 기도하면서 국제결혼이라는 첩첩산중을 넘어 결국엔 2007년 10월 6일 대학 3학년 때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과 한국의 국적을 넘어, 종교를 넘어, 직업을 넘어, 10살 연상의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그 때 결혼식에 온 수백 명이 넘는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이란!!!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이 상상 이상으로 행복하게 신혼을 보내고 있다. 물론 지금은 부모님의 사투리에 사투리로 대답하는 센스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서류작업은 한 번 까다롭지만, 결혼의 행복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국제결혼이 힘든 것은 국적이 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원래의 나는 이미 없다. 그래서 아내와 가족을 위해 맞추어가며 살 수 있는 것 같다.

한국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치아를 아래위로 다 의치로 하고 계신다. 요즘 잇몸이 약해져서 교환해야하는 시기인데, 한국의 치과는 너무나 비싸서 결국은 중국에 가서 하기로 결정했다. 병원비가 한국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다. 중국 가서 부모님이 의치를 교환하고 나면 아내와 함께 내 나라 중국을 소개시켜주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대접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나를, 단지 비전하나 보고 결혼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조금이나마 표현하고 싶다.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성공으로의 첫 번째 선택은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이고, 두 번째는 누나와 결혼한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을 기대하며, 계획했던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싶다.

장호 (ZHANG HAO)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