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동 '대구생명의 전화' 상담실(053-475-9191). 4년째 상담을 해온 손모(54·여)씨는 오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전화벨은 끊이지 않았다. "네, 네, 그렇죠. 네, 네…." 손씨는 30분 동안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울먹임이 새어나왔다. 손씨는 한 손으로는 메모를, 다른 한 손으로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이윽고 통화가 끝나자 바싹 마른 입을 축이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벨은 30초가 채 안돼 또 울렸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얘기가 태반입니다. 오죽 하소연할 곳이 없으면 이곳까지 찾았겠어요."
상담센터에서 지켜본 우리네 이웃들의 일상은 고단했다. '주식이 반토막났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집에서 놀고 있다', '남편이 실직했는데 애들 교육비를 줄여야하나' 등등…. 올 한해 유난히 힘겨운 삶에 지친 지역민들의 고충이 쏟아졌다. 단골 고민이었던 부부문제와 고부갈등은 경제난의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상담원들은 입을 모았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더군요. 자기는 죽어 마땅하다면서. 부인과 10년 동안 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얼마 전 몽땅 날렸다고 해요. 도저히 부인에게 말을 못하겠다면서…."
손씨는 최근 들어 경제 위기와 관련된 상담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특히 현재 극심한 경기침체와 경제난 가중으로 서민 가계가 붕괴된데 대해 정부의 잘못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대구생명의전화에 소속된 상담원은 200여명. 하루 4시간씩 2인 1조로 전화상담을 하고 있는 이들은 근무 시간 내내 상담실 밖으로 거의 나오지 못했다. 4시간 동안 받는 전화는 10통 안팎. 30분 통화는 기본이고 하소연이 길어지면 1시간 30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상담원들은 절대로 실명을 묻지 않았다. 나이와 직업 등 간단한 확인절차만 거치면 상담이 시작된다.
2년차 상담원인 최모(55·여)씨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니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는 푸념 섞인 하소연을 한참 듣고나니 함께 마음이 심란해진다"며 "경제가 그런대로 돌아가던 몇 달 전만 해도 듣기 힘든 전화"라고 했다.
세대별로 상담내용도 다양했다. 한 20대 대학원 졸업 여성은 "대학원까지 나왔는데도 취직이 안된다. 살만 찌고 있다. 살을 뺀다고 해도 취직이 될지 모르겠다"고 한참동안 넋두리를 했다. 한 30대 여성은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몇 가지 자격증을 땄지만 취업이 안된다. 대출이자가 고스란히 빚이 되고 있다"고 하소연했고, 50대 한 주부는 "오랜만에 연락온 초교 동창 부탁으로 보험에 가입했는데, 며칠 전부터는 돈을 빌려달라고 해 괴롭다"고 했다. 경제난은 인간관계도 삭막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 60대 어르신은 "노후를 대비해 모아둔 돈을 자식들이 요구하고 있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생명의전화가 올해 상담한 사례는 지난달까지 9천여건. 상반기 4천200여건에 불과하던 상담은 12월을 제외한 하반기에만 5천100여건에 달해 1천건가량 차이가 났다. 이경미 소장은 "올 10월 이후 경제난과 관련한 상담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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