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詩는 내 몸이 내지르는 소리"
한 여류 시인이 시집을 냈다며 신문사로 전화를 냈다.
"지인들을 만날 겸 (신문사에) 가는 길에 시집을 전해 주겠다"고 했다. "우편으로 보내시라"고 답했다. 이튿날 전화를 냈던 시인이 자리로 찾아왔다. 전화를 냈던 박정남이라고 밝히며 시집(명자/현대시인선 072)을 건넸다.
"우편으로 보내셔도 될 것을…."
시인은 대답없이 떠났다. 이왕 신문사에 왔다면 이번에 낸 시집이 어떤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한두마디쯤 이야기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시인은 휙 돌아서 갔다. 그 얼굴이 강퍅해보였다.
박정남의 시는 불편했다. 억눌린 사람의 말투, 일상을 부정하는 듯한, 어둡고 쓴맛 나는 시들이었다. 그녀 시집 '명자'는 지은 시가 아니라 쏟아낸, 게워 올린 '토사물' 같았다. 수소문해서 전화번호를 알아내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상에 불만 많으세요? 짜증나는가요?'기자의 말에 시인은 '그건 기자양반 탓이오'라고 답했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투로) 우편으로 시집을 부치라고 했으니, 나는 우체부 역할만 하면 되는구나 싶어 가는 길에 책만 전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 잘 이야기를 나누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첫인상이 딱딱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나는 짜증을 내는 쪽이 아니라 상대방을 짜증나게 하는 쪽이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고, 느려 터져서다."
박정남은 자신이 염세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다. 애살 많고 질투도 많다고 했다. 이번 시집의 빛깔이 어두운 것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집 '명자'에는 성적으로 불행했던 마릴린 먼로, 다이어트한 신부의 꽃다발, 일본군 위안부 장덕경, 장애인 이선희, 첫날밤에 소박맞은 파초의 전설, 태초의 인류인 318만 년 전의 어머니 루시까지 등장한다. 고통받는 여자들이다.
불행하고 고통받는 여성을 등장시킨 이유에 대해 시인은"생명에 대한 위기의식, 가정의 존폐를 통해 치유의 길을 모색해 본 것이다. 더 벼랑으로 몰고 갔어야 하는데, 이 정도로 불편해하다니…."라고 했다."글은 독자를 불편하게 해야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시인 박정남은 말했다.
"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한동안 내 시는 내 몸이 내지르는 말이었다. 시는 내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생을 즐기는, 스쳐가는 바람 같은, 풍경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예술이 되는 시를 쓰고 싶다."
바람 혹은 풍경 같은 시를 쓰기 위해 박정남은 먼저 자기 몸이 가벼워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겁다고 했다. 한국의 어머니란 혼자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남은 여성이고 아내고 어머니다. 그런 사람이 여성의 일상을 시종 어두운 목소리로 쏟아낸다. 그녀는 여성의 삶을 비참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기르고, 남편을 보살피는 삶은 긍정할만한 게 아닌가? 그런 삶 말고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걸까?
박정남은"젊은 물음이네요. (건전한 시각이네요, 라는 말로 이해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내가 걱정하는 것이다. 시골에 가면 노인 혼자 살고, 도시에는 젊은이 혼자 원룸에 산다. 서로 불편한 것보다는 고독을 택하는 것이다. 노인들까지 개인주의가 되어가고 있다. 이 현실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해하고 받쳐주고 감싸주는 관계야말로 인간관계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박정남은 1974년 처음 직장을 갖고 보니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편이 아니라 자신을 시중들 마누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남녀를 떠나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업을 가진 노처녀가 요즘 부쩍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아내가 되어야 할 여성이 아내를 구하니, 아내노릇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마누라를 구하고 싶었던 박정남은 어떻게 남편을 구했을까?
"마누라를 원했는데 독재자를 만났지요. 지금은 서로 양이 되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피를 흘렸겠어요. 저는 그 피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아이 때문에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인(人)자 말입니다. 하나는 받쳐주고 하나는 감싸주는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이 부부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남편은 제게 구원자 같은 사람입니다."
박정남의 시는 '울분에 찬 여성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시에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시작(詩作)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우주적 스케일을 가졌다고 했다. 여성의 몸이 그렇고 어머니가 그렇다고 했다. 여성은 확실히 크고 무한정 열려 있다고 했다. 다만 '문명의 현실'은 '좁아터져'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울분에 찬 여성의 목소리'는'남성' 혹은 '남성사회'를 향한 으르렁거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시인은 여성이 더 당당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다섯 딸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음 세상에서는 당당하게 사셔요'라고 외쳤어요. 태어난 기질대로 사시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라는 말이었어요. 상대방에 대한 배려지요. 상대방을 먼저 세워주어야 자기도 설 수 있는 것이지 않겠어요. 톨스토이 말처럼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박정남 시인은 이번 시집에 묶인 시 중에서 특히 '나팔꽃과 어둠'이 좋다고 했다.
'나팔꽃은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반 사이에 핀다 나팔꽃이 피는 데는 얼마간의 어둠이 필요하다 이제 나팔꽃은 하나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나팔 불지는 않는다 (중략) 나팔꽃은 아침 일찍 피어 내 어린 날처럼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동네방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크게 나팔 불어 소문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하략)'
오랫동안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인은 요즘 시인과 아내,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따금 시창작 교실에 나가 강의하는 게 전부라고 했다.
"인체 드로잉을 배우려고 해요."
요즘 들어 가을색이 무척 아름답게 와 닿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황혼녘 불로동 고분군의 억새와 아파트에서 보이는 범물동 가톨릭 묘지의 굴참나무 색깔이 참 아름답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슬픈 노래와 가슴 아픈 이야기, 잘 그려진 그림의 선과 색이 내게는 구원입니다."
△ 박정남은…
1951년 경북 구미 출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자유시 동인. 시집 '숯검정이 여자' '길은 붉고 따뜻하다' '이팝나무길을 가다' 등이 있다. 대구시인협회상 및 금복문화상 수상. 대구시인협회장. 대구효성여고 교사. 대구대 강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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