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의 끝없는 항의…금융맨의 눈물은 그래프를 타고

입력 2008-11-29 06:00:00

연초 전세계 주식시장 시가 총액은 무려 60조달러를 넘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달에는 36조달러대로 곤두박질쳤다. 달러당 1천200원 환율을 적용해본다면 7경2천조원에서 4경3천200조원대로 떨어진 것. 우리나라 한 해 총예산을 250조원으로 잡을 때 무려 이의 115배에 해당하는 돈이 10개월 사이 공중으로 증발한 것이다. 우리나라 시가 총액만 놓고봐도 연초 1조1천억달러에서 10월에 5천100억달러로 절반 이상 날아가버렸다. 가히 '패닉상태'가 아닐 수 없다. 피해 규모가 적당해야 울고 싶은데 이쯤 되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책임을 돌리고 싶다. 대상 1순위는 금융맨들이다. 책임은 투자자 본인이라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영업장을 찾아가 고함도 질러보고, 해결해 달라고 읍소도 한다. 하지만 현 시장상황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쏟아지는 항의 그리고 자괴감

은행 창구에서 투자 상담을 하는 김학준(가명·37) 대리. 그에게 1년 전은 아득한 옛날처럼 기억된다. "유럽이나 일본 쪽 펀드는 지지부진했지만 중국과 동남아 펀드는 재미가 쏠쏠했죠. 금액이 크건 적건 분산투자를 권유했고, 그래서 다른 쪽에서 기대하는 수익이 안 나와도 브릭스나 신흥 개도국 펀드가 괜찮았으니까 고객들도 좋아했습니다. 웃고 지나가는 날이 훨씬 많았죠." 잔인한 2008년 봄이 지나고 혹독한 여름과 가을을 보내며 그는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 만큼 핼쑥해졌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는 좀 더 기다려보라는 말도 못하겠어요. 차라리 욕짓거리를 하고 비난하면 덜합니다." 하루 한번꼴로 찾아오는 50대 아주머니 고객이 그는 가장 무섭다. 그저 "어쩌면 좋지요?"라며 한숨만 내쉬는 고객에게 해줄 말이 없다. 5천만원을 투자했는데 남은 돈은 1천200만원 남짓. 환매하지 않았으니 장부상 손실일 뿐이지만 그런 위로가 도움이 될 턱이 없다. 틈만 나면 영업점 밖에 나와 담배를 꺼내문다. 3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지 반년쯤 됐다. "언제쯤 나아질까요?"라는 질문이 가장 답답하다면서도 그는 기자에게 똑같이 물었다.

증권사에서 잔뼈가 굵은 윤성우(가명·45) 부장. "죽고 싶죠. 신문에서 증권맨 자살 소식을 들으면 남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어차피 투자는 고객 판단이라고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감히 고객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주식시장이 호황일 때 한 달에 거래 수수료 수입만으로 수천만원씩 벌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그런 시절이 올 수 있을까 싶다. "고객들이 걱정하면서 전화를 걸어오면 기다려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손절매 시기도 지났고, 손해를 감수하고 팔아치운 뒤 다시 수시 거래로 손해를 조심씩 메워나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불안한 시기에는 그럴 자신도 없습니다." 무너진 주식시장은 20년 가까이 쌓아온 그의 자신감도 무너뜨렸다.

◆금융맨, 나 역시 피해자

주가폭락으로 투자자들의 손실이 커지자 금융맨들의 자살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초 K증권 서초지점 직원 유모(32)씨가 모텔 객실 문에 넥타이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들은 "증권사 투자 상품을 판매했던 아들이 최근 주가 급락으로 고객들의 항의에 시달려 심적 부담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지난달 하순 모 생명보험사 지점장 유모(42)씨가 충남 공주시 한 뒷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주식이 폭락하자 투자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왔다"는 가족의 진술을 확보, 실적 부진에 따른 심적 고통으로 자살을 택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유 지점장은 생명보험사에서 변액보험 등 주가연계상품을 취급했으며, 펀드 손실이 커지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왔다는 것. '금융부티크'(비제도권 유사 투자자문사)인 새빛에셋 대표 최성국(55)씨도 지난주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씨는 투자자 20여명 개개인에게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다. 경찰은 유서에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작년 8월부터 자금압박을 받아오면서 투자자들에게 원금이라도 건져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평소 존경하고 아끼는 지인들에게 미안하다. 죽음으로써 빚을 갚겠다"고 적었다고 전했다.

대구지역 모 증권사 지점장은 "금융맨치고 자기 돈이나 친척들 돈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직접 투자한 돈도 절반 이상 손해를 봤는데 고객들의 비난까지 받고있다 보니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했다.

어느 은행원의 어머니가 쓴 편지도 인터넷에 회자되며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은행에 갔다가 펀드 때문에 손님과 은행원이 실랑이하는 모습을 봤다. 은행원이 쩔쩔매는 모양새에 자식을 은행에 둔 어미로서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너도 많이 힘들지? 생전에 정기예금밖에 모르던 너희 아버지까지 중국 펀드 때문에 반 훨씬 넘게 손실이 났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 이럴 때일수록 더욱 건강 조심하거라. 이 작은 간식으로 잠시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얼마 전 간식 꾸러미 속에 A4 용지 한 장의 편지를 끼워 아들이 일하는 은행에 보냈고, 간식을 받은 지점 직원들이 은행 내부 게시판에 띄우면서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으로 금융시장이 혼돈에 빠지면서 일부 고객들은 피해자 모임까지 결성해 소송 등 집단 대응까지 벌일 태세다. 지난달 10일 서울 우리은행 본점에는 이 은행 파생상품 '우리파워인컴펀드'에 투자한 고객 50여명이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처음 약속대로 원금을 보장하라. 펀드를 정기예금으로 속여 판매한 사실을 인정하고 문제를 즉각 해결하라"고 주장했다. 은행 측이 '원금 손실 가능성은 0.02%로 극히 낮다'고 광고하며 손실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 이 상품은 8월 말 기준으로 누적수익률이 -81.45%를 기록했다. 지난 11일 금융감독원은 광고 문구 조작 논란을 빚은 '우리파워인컴펀드' 가입자에게 판매회사가 손실액의 50%를 배상하라는 조정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올 들어 금감원에 접수된 펀드 관련 민원은 10월말까지 700건에 육박하고, 소송이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인 펀드만 10건을 넘어섰다. 증권사를 찾아가 고성을 지르는 대신 소송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다.

지난해 발간된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에서 저자(송승용 외)는 "펀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거나 펀드의 '펀'자도 모르는 직원들이 펀드를 판매하고 있다. 이것이 국내 금융회사의 현실"이라고 했다. 아울러 "직원이 추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펀드는 아니며, 그들의 추천 1순위는 수익률이 아니라 보수와 수수료가 높은 상품"이라고 했다. 펀드에 가입할 때마다 직원들이 내미는 '투자설명서'. 펀드운용방법, 투자위험, 펀드 운용 전문인력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자세한 설명도 하지않은 채 서류에 있는 '제공받고 설명들었음'이라는 자필 서명을 요구한다. 직원말만 믿고 해외펀드에 가입했다가 70% 이상 손실을 본 정모(48)씨는 "워낙 복잡한 내용인 데다 직원들도 그저 수익률이 얼마나 기대된다, 과거에 이 정도 실적을 거뒀다고만 말할 뿐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며 "물론 최종 책임은 투자자가 져야겠지만 과연 금융맨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운지 묻고 싶다"고 했다.

금융맨들도 할 말은 있다. 모 은행 과장 한영석(가명·37)씨는 "고객에게 '펀드 가입했다가 망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직원이 어디 있겠느냐"며 "수수료 마진이 높은 상품을 얼마나 파느냐에 따라 직원 평가가 이뤄지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