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서덜랜드 지음/이세진 옮김/교양인 펴냄
의사들은 오진하고, 장군들은 멍청한 전투를 고집한다. 관객들은 영화가 지루한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본다. 의사들과 장군, 영화관객들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의 인재를 선발하는 심사위원단, 특정분야에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들도 곧잘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린다. 똑똑하다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책 '비합리성의 심리학'은 비합리적 판단, 선택, 행동이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음을 갖가지 심리 실험을 통해 명쾌하게 보여준다.
◇ 인간은 정말 합리적인 동물인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실성하지 않는 한 대체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자신이 친구나 지인들보다 더 이성적이고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비합리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이 대체로 합리적이다'는 말을 100%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이 늘 최선의 방책을 찾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사고와 판단은 개인이 지닌 지식수준에서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 판단 혹은 합리성이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적 지식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 달에 가겠다고 나무 위에 올라간다면 바보같은 짓이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을 어린아이가 한다면 비록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합리적이다' 혹은 '합리성'의 기준은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합리적 사고와 합리적 의사결정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어쩌면 '합리'라는 말 자체는 '비합리'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논의가 불가능하다. 어쨌든 한 개인이 내린 가장 합리적인 결정조차도 때때로 터무니없는 결정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는 이유
영화나 연극을 보러갔는데 지루해 미칠 만큼 재미가 없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 경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경우 '돈만 날리는 것'이지만 자리를 지킬 경우 '돈과 시간을 날리고 스트레스를 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지불한 돈이 아까워 꾸역꾸역 그 영화를 본다. 이중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보유한 주식의 가격이 떨어지고 앞으로 오를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도 손실이 아까워 팔지 못한다. 군지휘관들은 그들의 전략이 명백히 무익한 것으로 드러난 뒤에도 그 전략을 계속 밀고 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베르댕 전투에서 8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헤이그 사령관의 판단 잘못과, 그 잘못된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얼마 되지 않는 계약금이 아까워 더 큰 손해를 감지하고서도 계약을 이행하는 경우는 흔하다.
여기에는 '자기를 속이는 심리'가 작동한다. 내키지 않거나 부도덕한 일을 하게끔 설득 당한 사람,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은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지어냄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대가가 시원치 않거나 보상이 적을 때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라도 해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 왜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가
이 책은 사람이 비합리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 중 하나로 '비합리성의 유전'을 든다. 예컨대 사자가 나타나면 원숭이들은 어떤 나무로 도망쳐야 가장 안전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나무 위로 도망치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잡히니까)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방어수단이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의 생존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사는 데 달려 있다. 우르르 떼지어 사냥해야 하고, 떼지어 도망치는 쪽으로 달아나는 게 유리한 셈이다. 이렇듯 집단에 충성하는 특징은 부적절한 상황에서 쉽게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한다.
우리 사회가 거처와 먹을 것을 얻고 가정을 꾸리는 데 대단한 합리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도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이유다. 누구든지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확률 이론과 통계를 모두 배우고, 모든 상황에서 그 통계와 이론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린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먹고 자고 입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 쓸 시간이 없어질 것이다. (말하자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 가장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충 생각하고 판단해도 본전은 한다는 '게으른 심리'도 인간이 비합리적인 판단을 계속하는 이유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기보다 경험으로 익힌 몇 가지 트릭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유리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일상에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정교한 문제'에 적용할 경우 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전문적 영역에서 '통계'보다 '직관'을 우선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직관 역시 상당부분 과거경험에서 비롯됐기에 '통계'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의 통계'인 '직관'보다 '분석조사하고 기록한 통계'가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의사, 장교, 엔지니어, 판사, 고위 공무원, 사업가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예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판단이나 조치는 반드시 합리적인 사고를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427쪽, 1만7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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