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사태로 시작한 전세계 금융 파동이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각국에서 무너지는 기업과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 여파는 잦아들 줄 모른다. 아메리카는 물론 성장 가도를 달리던 동유럽과 북유럽 신흥국가들도 두 손을 들고 나섰다. 세계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던 중국마저 사상 유례없는 금융위기에는 허우적거리고 있다. 세계 언론에서도 '위기'를 외치고 있다. 금융전문가들도 "공황에 빠지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라" "장기간을 바라보고 투자에 나서라"는 원론적인 전망을 내놓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한다. 내리꽂는 주가와 치솟는 환율 장세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며 '기회'를 들먹인다. 다시 한번 찾아온 이번 금융 '위기'는 IMF 사태 때처럼 '기회'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곳곳에서 보이는 '위기' 징후
현재의 금융위기 사태를 두고 흔히 '제2의 IMF 사태'를 우려하는 시각이 크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1997년 터져 나온 IMF 구제금융은 한국의 내부 문제였다. 일시적인 외환 보유액 부족 때문에 국가부도가 났고 IMF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현재 금융위기는 이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라는 외부요인에 의해 벌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더 있다. 현재의 금융위기가 세계에서 잇따라 터졌다는 점이다. 금융위기로 시장 수요가 줄어 경기 후퇴(recession)까지 거론되는 마당이다. 이는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인 한국에 치명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1997년의 외환위기 때는 부족한 외환 보유고를 채워줄 수출 물량이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금융경제 위기가 실물경제로까지 전파되면서 시장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수출 둔화는 이미 실제상황이 됐다. 지식경제부의 집계 결과 유럽연합(EU)으로의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10월 23.7%에서 올해 -8.2%로 크게 떨어졌다. 대미 수출도 32.6%에서 10.8%로 증가세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환율 급등도 반짝 효과에 그치고 있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6.7%에 이른다. 특히 석유 수급 불균형시에는 국가경제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곡물 수입도 마찬가지. 한국은 2006년 기준으로 식량 자급률이 25.3%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26위에 불과하다. 해외 자원 의존도가 높은 만큼 국제거래 가격 인상이 환율 인상으로 피해가 더 커지게 돼 있다.
내수시장이 부족한 것도 한국의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는 이유다. 한국은 수출이 부진할 경우 이를 만회해 줄 내수시장이 튼튼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IMF 사태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그마저 있던 소비계층이 더욱 얇아져 있는 상태. 1996년 68%가 넘었던 중산층 비율은 2006년 58% 정도로 떨어지는 등 해마다 비중이 줄고 있다. 대신 빈곤층이 같은 기간 11%대에서 17%대로 증가했다.
◆정부는 신뢰 잃고 해외에선 두드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우리정부의 정책이 신뢰를 못 얻고 있다는 점은 이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요소이다. 지난해 말부터 조짐이 시작된 고유가와 고환율 파동에서 경제 수장의 말 바꾸기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세계 경제 기류와는 반대로 외환정책을 구사하다 고유가 파동에 온 국민의 진을 빼놓았다. 최근 금융위기 사태에 대해서도 '한국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하다가도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말을 흘리고 다니며 '말 바꾸기의 달인'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해외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영국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6일 "한국이 아시아에서 금융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도했다. 이어 같은 날 14일에는 '가라앉는 느낌'이란 기사에서 "단기 대외채무가 과다해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정부에선 '외국 언론의 한국 때리기'라고 반박하지만 속사정은 정부의 대처부족인 것 같다.
주간 이코노미스트지는 11일자 보도에서 "정부 관계자가 입조심하는 게 낫지 않으냐"(뉴욕 헤지펀드의 한 매니저), "한국 시장을 조사하면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흘리는 말로 한국 정부의 정책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정책을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지 의문"이라며 해외 전문가들의 시각을 전했다.
◆위기 속에서도 부자는 난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의 준말'이라고 했던가? 지난 외환위기에서 돈을 번 사람들의 사례 말고라도 역사적으로 큰 변란이 있을 때 돈 벌 기회는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이 같은 암울한 경제 전망 속에서도 전문가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11일 프랑스 방문 중 "대미 의존도가 높은 현실에서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 등으로 한국도 매우 어렵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찰스 달라라 미국 국제금융연합회(IIF) 총재도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 및 아시아 경제·금융의 전망'이라는 주제 강연에서 "한국은 타국가에 비해 사정이 나쁘지 않다. 이를 위기로 보기보다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가에서도 "펀더멘털 대비 가격 하락이 커진 종목들을 재검토해 장기투자를 하게 되면 상당부분 만회할 수 있다"며 IMF 이후 기회가 또 왔다고 주장한다. 자산가치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현금을 최대한 보유하라"는 조언도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부동산 신규 투자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이운규 A+에셋 대구지점장은 2, 3년 뒤에 '절호의 기회'가 올 것으로 보았다. 그는 "미국 주택가격 하락 추세가 어떻게 달라지고 실물경기 회복이 언제 되느냐에 따라 경제회복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해 향후 3~5년간 낙관적으로 전망은 하되 리스크 관리에 신경 쓰는 '합리적 낙관주의'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엔 "버는 쪽보다 잃지 않는 쪽으로 위험 관리를 더 해야 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다량의 현금을 확보하고 있는 대기업이나 상위 1% 정도의 부자들이 아니고서야 '그림의 떡' 같은 조언일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일수록 독서 등으로 '자기계발에 투자하라'는 정석을 따르는 것도 해봄직하다.
'닥터 둠(Dr. Doom)'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투자가 마크 파버는 저서 '내일의 금맥' 머리말에서 '지금 우리는 가본 적이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며 (중략) 나는 장애물은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늘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거대한 매수의 기회나 매도의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적었다. 그의 말대로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세계적인 동반 경제 붐' 이후에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라도 안개를 헤쳐가는 작은 돛단배 신세에 불과하다. 이 난관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절벽이 될지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가 될지는 결국 거기에 도착해 보지 않고는 모를 노릇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재앙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
반세계화 운동에 앞장서 온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이 지난해 발간한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소개한 용어. 클라인은 이 책에서 '현대의 자본이 전쟁이나 천재지변, 쿠데타 등 각종 재앙(Disaster) 등으로 국민이 충격(Shock)에 휩싸여 있을 때 부자와 기업을 위한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어떻게 보면 '주식은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따르면 이번 금융위기 또한 자본과 지배 엘리트들이 국민이 충격을 받은 것에 대해 반성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이 원하는 체제를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제시한 "위기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경제원칙의 핵심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성장연료는 '자유시장'. 그러나 규제받지 않은 자유시장에서 인간의 탐욕이 과도하게 흐르면서 현재의 신용붕괴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곧 프리드먼 경제학의 어두운 종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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