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빚쟁이와 우산

입력 2008-11-08 06:00:00

지금은 임원이 된 한 금융인의 이야기입니다. 지점장 시절, 낮에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우산 몇 개를 챙겨들었습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거래 고객을 찾아나선 것이지요. 지점장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우산 선물을 받은 고객으로서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가 늘 탁월한 영업실적을 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신용경색 때문에 온 나라가 휘청거리는 요즘, 은행들의 영업 행태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묻지마' 대출 경쟁을 벌이던 은행들이 정작 신용경색이 빚어지자 앞다퉈 대출금을 회수하고 나서는 겁니다. 비오는 날 우산을 빼앗는 격이지요. 원래 은행들이 지난 몇 년 동안 기업과 가계 대출에 동원한 재원은 해외로부터 차입한 엔화·달러였습니다. 이제 만기가 도래해 외국에 상환해야 하다 보니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큰 원인을 국내은행들이 제공하고 있는 겁니다.

한 지방은행은 10년 전 IMF 외환 위기 때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비율이 낮아 위기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간판을 내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이 은행이 살 길은 증자뿐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이 은행의 주가가 2천원대였다는 점입니다. 증시에서 그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데, 누가 액면가 5천원으로 증자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러나 지역민들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가며 증자에 참여해 은행을 살려냈습니다. 지역 경제계의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일부 기업들은 주거래은행인 이 은행으로부터 받은 유·무형의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증자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증자는 대성공을 거뒀고 이 은행은 살아남았습니다. 지역민에게 큰 빚을 진 셈입니다.

물론 이 지방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들로서도 할 말이 없지 않을 겁니다. 냉혹한 금융위기 상황에서 제코가 석자인지라, 제몸부터 보전해야 하니까요. 이들 은행은 부실화된 시중은행들을 살리는 데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투입됐으며, 은행 증자에 쌈짓돈을 기꺼이 내놓은 고객들이 있었다는 점을 잊고 싶은 걸까요. 돈에는 양심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빚'을 내는 것도 능력이라지만, 빚은 영혼을 갉아먹는 악마 같은 것입니다. 지난 2003년 대구시를 출입하던 필자에게 조해녕 당시 시장이 건넨 말이 떠오릅니다. "명색이 인구 250만명 광역시의 시장인 내가 단 1억원의 예산을 빼내 사업을 벌일 수 없을 정도로 시 살림이 최악이다. 무조건 부채를 줄여야 한다. 내 임기 안에는 절대 기채(부채를 냄)를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부채 줄이기가 시의 최우선 정책이다."

5년이 흐르고 시장도 바뀐 지금, 대구시의 살림이 개선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김범일 시장 취임 이후 대구시의 재정 계획은 '필요하다면 과감히 부채를 낸다'는 것으로 선회했습니다. 여전히 대구시의 재정 상황은 전국 최악입니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죄다 민자 유치에 목을 멥니다. 한나라당이 여당 되고 지역 출신 정치인이 중앙무대에서 기세 날리는 소식은 들려도, 대구시 지하철 부채를 정부가 대신 떠안겠다는 단비 같은 소식은 감감합니다. 이번주 주말판에는 과다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대구시의 재정 상황(10면)을 다뤄봤습니다. 불황에 잘 되는 산업이 있는지 그 속설(5면)에 대해서도 취재해봤습니다. 마음이라도 넉넉하고 편한 주말 되십시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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