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관한 이론 그리고 속설과 지표 진짜야?

입력 2008-11-08 06:00:00

어딜 가나 불황이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한국 주식·외환시장은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하다. 전문가들이 들이대는 각종 경제지표는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경제의 주체들은 다른 방식으로 불황을 탐지한다. 바로 소비자의 씀씀이다. '여성들의 치마길이가 짧아질 것'이라거나 '매운 음식 판매가 늘 것'이라며 나름대로의 불황지표들을 거론한다. 불황을 엿보게 하는 속설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런 속설들은 실제로 경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불황의 단골 지표 패션상품

불황의 지표로는 패션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 중 여성의 치마길이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속설에 따르면 경기가 나쁠수록 여성의 치마길이는 짧아진다. 원리는 이렇다. 불황기에는 주머니가 가벼워지기 때문에 여성들이 원단이 적게 들어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니스커트를 선호하게 된다는 거다. 다른 해석도 있다. 짧고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더 돋보이게 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미니스커트 유행이 끝나면 불황의 끝도 멀지 않았다는 신호로 해석한다.

'남성정장 매출이 줄면 불황'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주부들이 옷을 살 때 아이 옷을 가장 먼저 사고 남편 옷은 우선 순위에서 나중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패션에 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결과를 불러온다. 남자가 들으면 좀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여성 화장품, 그 중에서도 립스틱의 색깔도 경기를 엿보는 지표로 사용된다. '경기가 나쁘면 여자들이 빨간 립스틱을 선호한다'는 속설이다. 지출을 줄이다 보면 여성들은 화장품 구매도 줄이고 립스틱 하나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이때 빨간색 계통의 립스틱 하나만으로도 화사한 얼굴을 연출할 수 있어서 빨간색 립스틱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립스틱 효과'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모든 속설이 들어맞진 않는다

패션상품 소비 경향과 불황과의 속설은 현실과 얼마나 부합할까? 대구 지역 유통업 관계자에 확인한 결과 이 중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틀렸다. 남성복 매출은 소폭이나마 줄어들었다. 대구백화점의 경우 최근 신사복 매출이 5, 6%가량 감소해 지난해에 대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동아백화점도 일부 이월·기획상품을 제외하곤 남성복 매출이 감소했다. 이는 여성복이나 잡화 판매가 비슷하거나 늘어난 것과 대조된다. 동아백화점 홍보실 관계자는 "미니스커트나 슬림 의상은 요즘 패션의 대세로 경기랑 별 상관이 없이 판매된다. (불황과 미니스커트의 상관관계는) 예전에는 들어맞았는지 몰라도 요즘엔 다르다"고 단언했다. '치마길이 이론'도 '불황=미니스커트' 공식에 반한다.

진한 색상의 립스틱이 유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립스틱 판매량이 립글로스 판매량을 추월해 연말까지 지난해 대비 6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액상 형태의 입술용 색조 화장품 립글로스가 젊은 여성층을 중심으로 매년 10% 이상 매출이 증가하던 것과는 상반되는 결과다. 이 회사가 최근 출시한 다기능 색조 화장품 립 파우더 틴트도 와인색 계열을 중심으로 판매가 호조를 이루고 있다. 빨강·분홍·와인색 립스틱은 중년 이상의 주부들이 많이 찾아 '아줌마 화장품'으로 취급되던 상품. 아모레퍼시픽 대구지역사업부 한 관계자는 "진한색 립스틱을 찾는 연령층이 중장년에서 청년층으로까지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먹고 마시는 걸로 경기를 본다

먹을거리에도 '붉은 열풍'이 있다. 바로 매운맛이다. 일부에선 경제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매운 맛을 찾는다고 말한다. 근거도 매우 과학적이다. 매운 맛의 통증이 뇌에서 천연 통증 치료제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하고 이로 인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도 매운 맛이 기운을 발산하는 효능이 있어 마음속 우울함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4년 10대 히트상품'으로 매운맛 제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닭고기를 비롯한 오징어, 햄버거, 돼지고기, 떡볶이에 어묵까지 빨간색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매운맛도 이제는 불황의 바로미터는 되지 못한다. 그동안 매운 맛 음식이 일반화했기 때문이다. 영남외식연구소 측은 "매운 맛도 하나의 트렌드였을 뿐이다. 요즘 소비자들은 단순히 맵다고 음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싸고 양이 많은 곳을 찾아간다"고 설명했다.

먹을거리 중에 불황 지표로 삼을 만한 것은 라면이나 빵을 들 수 있다. 지역의 이마트 8개점에서 10월 한달 동안 판매한 라면과 빵은 전년 동월 대비 각각 15.8%, 20%씩 증가했다. 멜라민 사태로 최근 소비가 주춤하다는 초콜릿도 전년 동월 대비 판매량이 40%나 늘어났다. 라면, 빵, 초콜릿 모두 불황때 판매가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제품이다.

불황에는 소주 소비가 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대한주류공업협회가 집계한 올해 1~9월 소주 소비량은 전년 대비 5.1%가 증가했다. 25억3천605만병이 소비됐으니 국민 1인당 53병꼴이다. 9월 한 달만 치면 2억8천242병이 팔려 지난해에 비해 7.9%가 늘었다. 1인당 5.9병 수준이다. 10월 들어선 롤러코스터 증시에 그만큼 술 마실 일도 많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번 불경기에는 맥주와 양주도 판매량이 5% 안팎으로 성장세를 보여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런 것도 불황의 방증

불황을 예감하는 지표는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자동차업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속설은 '불경기일 때에는 차의 색상이 화려해진다'는 말이다. 이 또한 소비자들이 차의 색깔을 통해 개성을 살리려 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불황일수록 무채색 차가 더 잘 팔린다는 얘기도 있다. 무채색 차량이 ▷원색 차량보다 때가 묻거나 흠집이 생겨도 표시가 나지 않고 ▷차량 관리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데다 ▷일반적으로 중고차 시장에서 원색 차량보다 5~10%가량 가격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대구지역본부의 석용기 과장은 "요즘은 신차 자체가 색깔이 다양한데다 소비자들의 구매 문의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했다. 중·대형차에서 보기 힘든 강렬한 색상을 사용하는 경차의 인기 폭발도 불황의 한 단면이다.

불황기에 사람들은 가전제품 구매도 미루거나 작고 값이 저렴한 제품 위주로 산다. 드럼세탁기에 밀려 구경하기 힘들어졌던 일반 세탁기가 다시 각광받는 것이 대표적인 예. 시장조사업체 GfK코리아의 조사 결과 지난 2분기 일반 세탁기는 판매가 17% 늘었다. 반면 드럼세탁기는 5% 줄었다. 이밖에도 불황에는 영화관을 찾는 손님과 길거리에 버려지는 애완동물이 증가한다. '한탕주의' 심리로 복권이나 도박 인구도 늘어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답을 얻고자 점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부부관계가 좋아져 콘돔 판매가 증가한다는 설도 있다. 중고품 거래가 활성화하는 것도 바로 불경기일 때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대중의 취향 또한 경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같은 길고 느리고 의미심장한 노래 또는 '마카레나'(Macarena)처럼 노랫말에 의미가 거의 없는 곡 ▷나이가 더 들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몸매 굴곡이 덜한 모델이 인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약 소비 증가 ▷범죄 증가 ▷교통사고·심장병 등이 줄어 사망률 감소 ▷행복도가 낮아 자살률 증가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치마길이(skirt-length) 이론

미국의 경제학자 마브리(Mabry)가 1971년 뉴욕의 경제상황과 치마 길이와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면서 내놓은 이론. 마브리는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면 주가가 오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기가 호황이던 60년대에 여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었고, 오일 쇼크 등으로 불황이었던 1970년대에는 긴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를 증거로 들었다. 이와 반대로 불경기가 되면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이론, 경기변동과는 무관하다는 설, 미니스커트가 20년마다 유행한다는 분석도 있다.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

경기불황일 때 저가임에도 소비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품이 잘 판매되는 현상. 립스틱만 발라도 분위기를 바꾸는 효과를 얻는다는 뜻이 경제상황에 적용됐다. 여성들은 경기가 어려워지면 전체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대신 립스틱처럼 작고 저렴한 제품으로 자신을 과시할 방법을 찾는다. 기업에서는 이를 응용해 불경기에 저비용으로 고효용을 줄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로더(Estee lauder)사는 이와 관련 립스틱 판매량과 경기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는 '립스틱지수(leading lipstick index)'를 만들었다. 비슷한 용어로는 '액세서리 효과(accessory effect)'를 들 수 있다.

▨미국 경제전문가들이 보는 불황 지표(뉴욕타임스 인용)

1. TV 광고가 진지해진다.(폴 크루그먼 MIT대 교수)

2. 집수리 예약이 쉬워진다.(로렌스 쿠드로 CNBC 경제해설가)

3. 맥도널드 구인광고가 감소한다.(로버트 고든 노스웨스턴대 교수)

4. 소형차 판매량이 급증한다.(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

5. '묻지마 투자'가 줄어든다.(클레어 젬펠 로버트 베어드투자회사 수석연구원)

6. 스타벅스 커피 맛이 싱거워진다.(메레디스 백비 '미국 연례 경제보고서' 저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