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儀典)은 행사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명사'(名士) 타이틀을 달고 행사장에 참석한 인사들에게는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가 중요한 관심사다. 의전상 결례를 대범하게 웃어넘기는 도량도 필요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지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자신이 대표하는 기관·단체의 명예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민감히 반응하는 사람도 많다. 또한 의전상 결례도 잘못이지만 지나치게 고위급으로 대접하는 의전도 꼴불견이 된다.
◆의전, 지나쳐도 모자라도 말썽
지난달 열렸던 서울대학교 국감장에서는 지나친 의전이 웃음거리가 됐다. 감사 나온 국회의원들 명단 밑에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커피는 어떻게 타야 취향에 맞는지 등을 적어놓은 문서가 발견된 것. 행여 의원들의 심기를 거스릴 세라 불필요한 의전 문서까지 만든 셈이다. 국회와 피감기관이라는 엄격한 관계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참가자 기호도를 맞추는 것은 의전상 챙겨야할 중요 사안 중 하나다. 때문에 대부분 의전상 문제는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보다 의도했건 실수였건 결례로 비쳐져서 빚어지는 것들이 많다.
최근 대구에서 벌어진 기념행사도 마찬가지. 주빈석에 마련한 자리 배치 때문에 감정이 상한 한 자치단체장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주최 측이 실무자 실수라며 사과해 일단 무마되기는 했지만 해당 단체 관계자 측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는 후문이다. 행사 말미에 건배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순서가 달라졌다며 한 기관장이 상당히 기분 나빠했고, 뒤에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좋지 않은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인사는 "주최 측의 진의가 무엇인지, 실제로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의전상 결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그런 결례에 대해 해당 기관·단체장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 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의전은 '그들만의 리그'(?)
행사가 본연의 뜻을 저버리고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때 시민들은 분개하기도 한다. 경북의 군 단위 축제 행사장에서 몇년 전 벌어진 일. 개막식 자리에서 VIP들의 인사말과 기념사, 축사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대개 군 단위 행사에는 국회의원, 군수, 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경찰서장, 지역교육장, 소방서장 등 각급 기관·단체장들이 줄줄이 참석한다. 참석자 직함과 명단만 열거해도 한참이 걸리는 행사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겠다고 나서는 탓에 행사는 하염없이 길어졌다. 급기야 기다리다 지친 주민들은 '우~'하며 야유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행사장 한가운데로 물병이 날아드는 불상사까지 벌어졌다. 이를 지켜본 한 관계자는 "사전에 인사말을 할 사람들을 추려내지만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이유를 묻기 전에 화부터 내기 때문에 진땀을 뺐다"며 "특히 국회의원 지자체장 시·군의원처럼 선출직의 경우 인사말에서 빠지면 언짢은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절대 뺄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3월 완공된 경기도 안산 종합운동장의 이름은 '와~ 스타디움'이다. 이름이 지어진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지난 2006년 겨울, 경기장을 지어놓고 이름을 공모하던 중 안산시장이 지역 여성 축구대회 개회식에서 축사를 하게 됐다. 추운 날씨에 떨고 있는 참석자들에게 안산시장은 "날씨가 추우니 축사를 짧게 하겠습니다"라고 했고, 참석자들은 "와~"하며 탄성을 질렀다. 여기서 떠오른 이름이 '와~ 스타디움'. 영어로 원더풀 안산(Wonderful Ansan) 또는 웰컴 투 안산(Welcome to Ansan)으로 해석도 할 수 있다.
◆겉다르고 속다른 의전의 진실
의전상 문제가 아니라 참석 인사가 지나친 대접을 요구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다. 경북지역 군 단위 행사에 참석한 모 기관장은 당연히 준비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의 자리가 단상 위에 없자 화를 내면서 해당 지역 책임자의 따귀를 때리는 등 크게 질책했다고. 뒤에 알아본 결과, 당초 참석을 고사했던 기관장이 갑작스레 참석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당 단체 관계자는 "사전에 참석 여부를 물었을 때 불참을 통보했다가 갑작스레 일정을 바꾸거나, 초청 인사도 아닌데 찾아와 자리를 요구하는 등 의전상 돌발 변수가 발생할 때, 가장 곤혹스럽다"고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아무리 기분이 언짢았더라도, 의도된 실수가 아니면 대개 참석자들은 행사에 대해 덕담으로 마무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1호차'로 불리는 기관·단체장의 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들은 행사를 마치고 차에 타서 던지는 첫 마디를 들으면 행사가 어떠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한 기사는 "차에 타서 '겨우 이런 거 하려고 바쁜 사람 불렀구먼'이라며 첫마디를 던지면 몹시 기분 나빴다는 뜻"이라고 했다. 물론 더 심한 말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 단체 의전 담당자는 "행사를 진행하면서 인사말, 축사를 부탁해도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며 사양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럴 때에도 덥썩 '예, 알겠습니다'라고 끊어버리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며 "대개 두어번 더 부탁하면 마지못한 척 받아들이기 때문에 '노'(No)라고 말할 때도 진의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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