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나?…돈 줄 막힌 대한민국

입력 2008-10-25 06:00:00

매일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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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돈이 없다고 한다. 돈이 돌아야 경제가 살아나는데 현재로선 전혀 그렇지 못하다. 경제의 혈액으로 불리는 '금융'이 이처럼 동맥경화에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팔다리를 온통 고무줄로 꽁꽁 묶어놓고 피를 내보내지 않는 형국이 됐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주식시장 붕괴로 자산가치가 급락하자 서로 돈줄을 묶어놓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전세계가 그렇다. 전세계 금융 혈액의 공급처인 뉴욕의 심장 박동에 이상이 감지되며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돈이 부족한 상황

은행 상황을 들여다보자. 은행에 돈이 없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정말 금고에 돈이 없거나, 금고에 돈은 쌓여있지만 은행에 돈을 빌려준 사람이 언제 자기 돈을 돌려달라고 할 지 몰라 남에게 빌려주지 못한 채 그저 쌓아만 두고 있는 경우다. 돈이 없는 것도 맞다.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돈이 빠져나가면서 은행 금고에 빈 공간이 생긴 것이 사실. 주식과 부동산이 호황이라면 그만큼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 수익이 생기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빌려준 돈이 돌아올 날은 멀기만 한데 당장 금고 속의 돈을 돌려줄 시기는 바짝 다가왔다는 점이 문제다. 조금 어려운 말로 '미스 매칭'(만기 불일치) 문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은행이 금고에 넣어둔 돈(고객이 수시로 빼가는 돈을 뺀 정기예금) 347조여원 중 6개월 미만 단기예금은 37조원 가량으로 10.67%에 이른다. 이 비율이 두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03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반면 주택담보대출 만기는 갈수록 길어진다. 작년 말 기준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평균 약정기간(원금을 돌려받는 시기)는 12.7년이다. 선을 긋듯이 딱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는 원화 유동성 문제다. 즉 은행에 돈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돈을 인출해가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은행 금리가 높아지면서 예금이 조금씩 늘고 있다. 펀드나 주식, 부동산에 돈이 묶인 상황이 아니라면 은행으로 돈이 들어오고 있다.

◆달러 공급이 해결의 열쇠

정작 큰 문제는 달러도 없다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외환 보유고가 바닥난 것도 아닌데 달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신뢰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씨가 마르자 외국은행들은 우리나라 은행에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예전 같으면 꾸준한 이자 수익을 받기 위해서라도 만기가 돼도 다시 만기를 연장하는 식으로 대출을 유지해 왔다. 이것을 롤오버(Roll over ; 만기연장)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롤오버 비율이 100%를 넘었다. 만기가 와도 돈을 갚으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더 빌려줬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 9월 1년미만 단기자금의 롤오버는 70%까지 떨어졌다.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돈을 달러로 갚았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달러가 한국에서 빠져나갔다는 말이다. 외국의 은행들은 자기들도 달러가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달러 빚을 내주기는커녕 우리나라 은행에 빌려준 달러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고 있다. 일본 은행들은 1년미만 단기 차입금에 대한 롤오버를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고, 중국 은행의 롤오버 비율은 최근 20% 이하로 떨어졌다.

◆비싼 이자 내고 달러 구해오기

돈이 없으면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달러도 마찬가지다. 은행에 들어오는 예금은 줄고(최근 금리 인상으로 상승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은행이 갚아야 할 돈은 늘다 보니 결국 옆 동네 은행에서 돈을 빌려와야 한다. 하지만 이미 서로의 믿음에는 금이 간 상태. 돈을 빌려줬다가 언제 떼일 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달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은행들이 돈을 조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양도성예금증서(CD)나 은행채를 발행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게 조달한 돈이 지난 4월말 기준으로 283조여원. 정기예금 잔액 306조여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정기예금은 비교적 싼 이자를 지불하지만 CD나 은행채는 이보다 조달비용이 높다.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왔으면 그만큼 높은 이자를 주고 대출을 해서 이자 수익을 챙겨야 하지만 여건은 그렇지 못하다. 마구잡이로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행끼리도 돈 빌리기가 쉽잖다 보니 은행채 금리는 높아진다. 이자를 높게 쳐 줄테니 제발 돈을 빌려달라는 말. 이달 초 은행채 발행금리는 7% 중반에 이르렀고, 이달 들어서만 0.22%포인트 올라 지난 14일엔 연 7.82%까지 치솟았다.

◆피해는 서민들의 몫으로

현재의 금융상황에서 서민들은 죽을 맛이다.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부담이 만만치 않다. 은행이 비싼 이자를 물고 돈을 빌려왔으니 대출이자도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은행들의 3개월 변동금리형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6.7%대에서 현재 8.7%대로 급증했다. 이자 부담만 커지는 게 아니다. 주부 손모(32)씨는 "4년 전 결혼할 때 빌린 돈의 거치기간이 끝나고 내년부터는 원금을 갚아야하는데 펀드에 넣어둔 돈이 반토막 나는 바람에 막막해졌다"며 "매달 이자부담만 50만원이 넘는 상황에서 원금 상환까지 시작되면 현재 사는 집을 헐값에라도 팔아야 할 판"이라고 했다.

중소기업들은 더 죽을 맛이다. 그나마 형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성서공단 모업체 대표 김모(45)씨는 최근 공장 이전문제로 은행에 대출 상담을 하러갔다가 면박만 듣고 왔다. "신용대출은 아예 엄두도 못내고 담보가 있다하더라도 은행 측에서 대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대출자금 만기가 돌아왔을 때 갚으라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은행 돈이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성서공단 쪽은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하는데도 이 정도로 앞으로 2, 3개월 더 돈줄이 묶이면 최악의 상황이 우려됩니다."

그나마 국책은행은 나은 편이지만 여전히 문턱이 높고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은 아예 문을 걸어잠근 상태다. 대출 호황기와 현 상황을 비교해달라는 물음에 한 은행 관계자는 답변을 못했다. "은행 자체가 어렵다 보니 돈은 있는 대로 거둬들이고, 내놓는 돈줄은 완전히 잠갔다고 보면 됩니다. 기업체측에는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대출은 불가능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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