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극복수기] 은상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

입력 2008-10-23 09:13:43

대구직업전문학교 디지털사진과 이종룡 선생님의 문자메일을 받고 한동안 가벼운 고민에 빠졌다. 학교와 매일신문사가 공동주최해 실업극복 논픽션수기를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응모를 권유하는 속내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망설여졌지만 지난 1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이제 한번쯤 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졌다. 또한 이종룡 선생님을 비롯, 여러 직업전문학교의 선생님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와 천직처럼 생각하고 몸담았던 대구의 첫 직장서 명예퇴직한 것이 1998년 2월. 그 후 몇 군데 더 직장생활을 하며 마지막 직장이 됐던 한국언론재단서 퇴직한 것이 2002년 12월 말. 말이 좋아 명퇴지 정리해고나 다름없었던 서너번의 퇴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마지막 퇴직을 꼭 1주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겨우 50대 초반의 나이 때부터 반신불수가 된 육신을 부둥켜안고 살아온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2002년 12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강권에 따라 사표는 이미 반년 전에 제출하였고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정말 치밀어 오르는 어떤 분노와 절망감으로 몸이 훨훨 타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힘든 백수생활을 어떻게 또 다시 한단 말인가 ? " 아이들의 미래는? 몸이 약한 아내는? 별별 생각에 달서구 노인대학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날 미디어교육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고 귀가하다 노인대학 입구의 버스정류장서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강의 도중 왼손에 들었던 교재를 자꾸 놓치고 무언가 오른쪽 귀 뒤를 자꾸 간질이는 느낌이 왔을 때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던가? 내 주변으로 노란 유황비가 내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직감적으로 뇌동맥 혈관의 이상을 확신한 나는 본능적으로 도로변 아파트의 정원에 휘휘 늘어져 있던 줄장미 가지의 가시를 훑어 열 손가락 끝을 찔러대었다. 짬짬이 배워둔 수지침 상식을 신속히 응용하였던 것이다. 보도에 떨어지는 흥건한 핏방울을 보며 의식을 잃고 말았고 행인들의 도움으로 119구급차로 후송된 나는 힘든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필연코 반신불수란 후유장애를 안고 말았다. 며칠 후 의식을 회복했을 때 병상에는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지키고 있었다. 그때부터 마라톤처럼 지루하고 험난한 재활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 5월, 완치란 판정을 받고 대학병원을 퇴원할 때도 나는 언어, 보행, 손동작 등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라의 경제상황이 그랬던 걸 어떡해요! 목숨 건진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아세요."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아내 앞에서 나는 꼭 다시 일어서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직은 뇌병변장애 3급의 중증 장애자가 한번 더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는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서리라. 보란듯이…" 나는 사장과 면담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직속상관의 "박부장. 사장에게 그토록 밉보였더냐?"라는 말 한 마디만 들은 채 22년간 근무하고도 쫓겨나오다시피 했던 첫 직장의 그 경영진 간부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 놀라고 말았다. 이젠 잊어야지. 버릴 건 버리고… 그리고 나는 평소부터 꿈꾸어 오던 출판인으로 거듭나기로 굳게 맹서하였다. 어차피 날 더 이상 채용해 줄 직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산재 장애자란 이름 아래 숨어지내듯 하기란 죽는 것보다 싫었다. 산목숨이면 당연히 일을 해야지. 그것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가장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 그러자면 우선 언어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막내에게 직업전문학교 중에서 언어와 관련한 과목을 개설하는 곳이 있는가 알아보라 했더니 대구직업전문학교에 일본어 관광통역과정이 곧 개설된다는 것이었다. 불안한 눈초리로 아버지를 쳐다보던 막내의 그 가녀린 눈길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늦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3년 8월의 어느날. 대구직업전문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담당선생님은 난색을 표했다. 벙어리나 다름없는 사람이 관광통역과정에 도전하겠다니? 오른쪽 뇌세포의 상당 부분이 괴사한 상태여서 음식조차 씹지 못하던 내가 생각하여도 그것은 무리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6개월의 과정이 끝났을 때 나는 결석은커녕 조퇴, 지각, 외출 한번 없는 완벽한 출석 기록과 함께 마침내 언어능력을 되살릴 수 있었다. 김애란 선생님께서 열심히 공부한데 대한 기념으로 공로상을 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좀더 언어훈련을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교재를 따라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4성이란 특성이 있는 중국어학습은 언어 단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통대 4학년이던 2005년 대구직업전문학교에서 정보통신시스템이란 또 한 번의 과정에 도전하면서 나는 보행능력도 많이 되찾게 되었다.

거주지인 복현오거리에서 대구역부근의 대구직업전문학교까지 매일 서너시간 도보로 등하교하는 고행의 시간 끝에 나는 보행능력을 50% 정도 되찾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출판사 창립의 꿈도 조금씩 현실화시켰는데 곧 큰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진이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마당에 사진도 내가 직접 촬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면 사진촬영법을 또 배우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명색이 출판사 꿈을 꾸는 놈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달랑 컴퓨터 한 대 뿐인 처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본이라니? 언감생심 그건 신문에나 나오는 경제용어일 뿐이었다.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졸업도 한 홀가분한 상황에서 2006년 봄, 나는 다시 대구직업전문학교 디지털사진과의 문을 두드렸다. 첫 직장의 어느 선배에게서 선물받았던 「필름카메라 캐논EOS630」을 목에 걸고 등교했을 때 나는 화려한 디지털장비로 무장한 학우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더욱이 출사 후 촬영해 온 사진을 평가받을 때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한 손으로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찍자니 자꾸 흔들려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왼쪽 눈이 잘 감겨지지 않아 대신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렌즈라곤 100mm밖에 없어 촬영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교 후엔 집에서 한 시간 가량 셔터 누르는 연습을 하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그런 나의 사진공부를 열심히 지도해 주신 이종룡 선생님에게 무언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끝에 수업 중 들은 강의내용 중 초점이 될만한 말씀을 파일로 정리해 학우들에게 나눠드리도록 하기도 했다.

사진공부를 시작한지 석달 째 접어들 무렵 마침 하동에서 하동야생차 사진촬영대회가 열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학우들을 따라가 촬영대회에 참가하였다. 보행이 완전하지 않아 우왕좌왕, 자빠지고 엎어지며 거기다 불구나 다름없는 왼손으로 카메라를 받치고 필름과 배터리를 갈아끼우는 고행 끝에 겨우 필름 세 통의 사진을 촬영해 낼 수 있었다.

그중 인화해 뽑은 사진 3장을 우송하고 '한번 해보았다.'는 가벼운 심정으로 지냈는데 한 달쯤 뒤 수업이 없던 주말, 이종룡 선생님으로부터 '입선축하'메시지가 왔다. '차따는 소녀'로 제목을 붙인 한 점의 사진이 입선된 것이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나는 흔해 빠진 입선 소식이었지만 날 것처럼 기뻤다. 그런 추억을 쌓으며 사진과정도 거의 끝날 무렵 다시 국가기술자격증 사진기능사 시험에 도전해 보았다. 디지털 사진시대에 필름촬영으로 시작, 현상 인화작업으로 진행하는 아날로그 작업과정의 시험은 무의미하였지만 난 자신을 시험하며 가능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한 손으로 해야 하는 암실작업연습은 끝없는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하였고 암실작업을 끝내고 나오는 나의 표정은 항상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종룡 선생님은 항상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사진과 수료를 열흘 정도 앞두고 사진기능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사진기능사 시험준비는 색채의 본질과 사진 전반에 관한 매커니즘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대구직업전문학교 사진과 학습 역시 100% 퍼펙트 출석으로 마무리한 나는 2007년 여름엔 서부정류장 부근의 대구디지털디자인교육센터서 4개월 코스의 편집디자인과정을 또 수료하며 출판사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2008년 3월 마침내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마을 시골집 집필실을 사업장으로 하는 도서출판 밀어(密語)를 국립중앙도서관과 청도군청, 경산세무서에 등록, 1인출판사를 출범시켰다. 그러는 사이 내가 집필한 책도 네권이 됐고 일부는 교보문고 등에 납본하고 있다. 올해 안으로 세권을 더 출판할 계획이다.

아직은 보잘 것 없이 얼굴 붉힐 정도의 작은 출판사지만 내가 쓴 책을 좀 더 자유스럽게 출판하며 보잘것 없는 지식이나마 세상에 알리고 나와 같은 퇴직자, 장애자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그런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우뚝 서고자 한다. 첫 직장서 퇴출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암담하고 우울했던 퇴직자의 일상을 떨치고 일어선 지금 장래는 불투명하지만 행복하다.

혼자 집필하고 사진찍고 편집하며 배본까지 하는 출판사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난 알 수 없다. 신은 아시겠지. 10년전 어느 날 갑자기 퇴직이란 총탄을 맞았듯이 언제 또 중풍재발이나 사고로 이 일을 끝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이 내일 당장이더라도 그때까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불굴의 근로자이고 싶다. 「마음뿌리 있다면 만개의 팔(가지) 벋는 영광은 온다(心根萬臂榮)」는 신념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하루하루가 틀리게 알이 굵어지는 감나무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직업전문학교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직장을 떠난 후 망가질대로 망가진 의지를 진정 그 곳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퇴직자, 특히 장애자 여러분들. 절대 용기를 잃지 마세요. 절대로. Never!

박해봉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