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는 괴작이다.
흥행 논리에 휩싸여 다양하지 않은 한국 영화계의 메뉴판에 전혀 색다른 음식이 나왔다. 알싸하게 간도 잘 맞고, 요리 재료도 싱싱하다. 빛깔은 가벼운데도 깊은 맛이 난다. 대중의 기호에 뭉뚱그려 고추장 넣고, 파 썰어 넣어, 맛이 간 김치와 함께 나오던 메뉴판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괴이한 느낌이 앞선다.
도대체 요리사가 누구야?
이경미(36). 낯선 여성 감독이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로 2004년 단편영화 '잘 돼가? 무엇이든'(36분)을 감독해 그해 서울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관객상,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직장 여성의 다툼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시시콜콜한 일상과 여성의 감성을 섬세하게 그렸던 전작처럼 '미쓰 홍당무'도 소외된 주인공의 일상을 4차원적인 코믹과 애정 넘치는 감성으로 그려주고 있다.
29살의 노처녀 양미숙(공효진). 이유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을 앓고 있다. '가장 재미없는 선생님'으로 학생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하는 여고 러시아어 교사. 사제지간이었다가 이제 한 학교에서 근무하는 서종철(이종혁)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녀의 연적은 이 학교 최고의 미인 이유리(황우슬혜)선생. 학생 뿐 아니라 교사들로부터도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이쁜 것들은 다 죽어야 해!" 툭하면 땅을 파고 삽질하는 그녀가 가장 파묻어버리고 싶은 인물이 유리다. 급기야 그녀는 서 선생의 딸 종희(서우)와 함께 그녀를 떼내기 위해 해괴망측한 작전에 돌입한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어릴 때부터 왕따가 몸에 밴 인물이다. 졸업여행 사진을 찍을 때도 아무도 그녀를 챙겨주지 않는다. 담임이었던 서 선생이 유일하다. 그런데도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만 빼면 그녀는 씩씩하다. 고함도 지르고, 삿대질도 하고, 비딱하면 신경질도 부린다. 그녀는 돌출적인 엽기걸이다.
오래된 소외 때문에 소통이 서투를 뿐이다. 정글과 같은 인간관계에서 솔직함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절하게 감정을 숨기는 기술도 필요하다. 양미숙은 얼굴이 빨개지는 통에 천성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힘들어진다. 그녀는 비호감이라는 콤플렉스를 복합적으로 가지면서도, 가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꼬는 입체적인 캐릭터이다.
네 명에 서종철의 아내 성은교(방은진) 등 다섯 명의 캐릭터의 엎치락덮치락 해프닝이 이야기의 전부다. 큰 그릇을 버리고, 적은 레시피(요리법)로 승부를 건다. 양미숙을 통한 관계에 대한 은유와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발랄한 톤으로 잡아간다. 공효진의 망가진 연기와 함께 서우, 황우슬혜 등 신인 연기자들의 연기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쓰 홍당무'는 청소년들이 공감할 교정이 주 무대. 그러나 이 영화는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사제지간의 사랑, 유부남을 두고 펼쳐지는 두 여자의 쟁탈전 등 설정이 다소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다. 또 인터넷 채팅에서 '너 참 맛있다' '너의 사타구니 깊숙이 내 코를 쑤셔 넣는다'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 등 과감하고 직설적인 대사들이 난무한 것도 원인이 됐다.
기존 장르와 차별되는 독특한 개성이 만발한 영화다. 타인과 소통해가는 과정을 가볍지 않게, 그러면서도 웃음을 놓치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몇몇 감독들이 영화 속에 얼굴을 드러내 신예감독의 기를 살려주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첫 영화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의 기호에 부합될지는 의문이다. 사실 요즘 영화팬들은 흥행논리로 형성된 드라마구조에 익숙해 있다. '괴작'이란 느낌처럼, 낯설음만 감당할 수 있다면, 제법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영화다. 늘 먹던 음식이 식상할 때, 때맞춰 잘 나왔다. 100분. 18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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