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에 무지개를 띄우다

입력 2008-10-11 06:00:00

대전시 도심재생 계획 '무지개 프로젝트'

▲ 대전시가 무지개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한결 깔끔해진 거리 모습(위에서 부터). 작은 사진은 사업 전.
▲ 대전시가 무지개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한결 깔끔해진 거리 모습(위에서 부터). 작은 사진은 사업 전.

새로운 도심 환경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재건축·재개발밖에 없는 것일까? 아무리 번듯하고 화려한 집을 짓고 산뜻한 도시 환경을 만든다고 해도 거기에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 살고 싶어도 눈물을 삼키며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방향이다. 그래도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대전시의 '무지개 프로젝트'를 보고 한번쯤 다시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달동네는 어쩔 수 없다'는 편견을 씻어버린 '무지개 프로젝트'를 살펴보자.

◆누구를 위한 재건축, 재개발인가

# 작지만 어엿한 자기 집을 갖고 살고 있던 박귀주(70·대구시 달서구) 할머니는 몇해 전부터 세입자 신세가 됐다. 젊어서 월세나 전세를 산다면 훗날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년 넘게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기분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49㎡(15평)형 서민 아파트였지만 자녀들을 키워 대학 공부까지 시킨 곳이었고,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박 할머니는 꿈과 추억의 공간을 불도저와 굴삭기에 내줘야 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돈. 작은 아파트 보상비로 받은 1억원 남짓한 돈으로는 깔끔한 새 아파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장 작은 규모라도 해도 8천만원을 추가 부담해야 했고, 조합원 추첨을 통해 배정되기 때문에 작은 아파트에 당첨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살던 곳에서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전셋집을 마련해야만 했다. 인근 아파트 단지가 전부 재건축 광풍에 휩쓸리는 바람에 근처 아파트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 할머니가 잃은 것은 단지 집 한채가 아니다. 20년 넘게 살아오며 정들었던 친구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그나마 자식이 있는 친구들은 비록 얹혀살더라도 다시 새 아파트로 입주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 당장은 부동산 시장이 워낙 얼어붙어 전셋값을 올려달라는 말이 없지만 행여 1천만원이라도 올려달라고 주인이 요구하면 다시 더 싼 곳을 찾아 이삿짐을 꾸려야 한다. 박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일찍 죽어야지"하는 넋두리를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다.

# 대전시 동구 법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모(72) 할아버지. 지난 추석에 명절을 지내러 온 자식들 입이 떡 벌어졌다며 자랑부터 시작했다. "시에서 동네를 살 만한 곳으로 바꿔주겠다면서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예전 모습만 기억하던 사람들이 한번씩 찾아오면 깜짝 놀랍니다. 죽을 때까지 여기 있고 싶어요." 전국에 부동산 개발 논리를 앞세운 재개발·재건축 광풍이 몰아칠 때, 이곳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다행히 화살을 비껴갔지만 '못사는 동네' '지저분한 아파트'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2년 새 이곳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지은 지 15년 된 건물을 새로 도장한 덕분에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고, 부엌에 있던 싱크대로 새로 바꿔주었다. 칙칙한 실내 조명등도 산뜻하게 바뀌었고, 누렇고 시커멓던 벽지도 화사한 분위기로 달라졌다. 이곳뿐이 아니다.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대신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는 사업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아파트 뒤쪽에 있던 지저분한 쓰레기 처리장은 산뜻한 지붕을 얹은 창고형 재활용 처리장으로 바뀌었다. 냄새가 나고 워낙 더러워서 동네 불량배들조차 오기를 꺼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새로 지은 건물 안과 바깥에 깔끔하게 재활용 처리대상들이 쌓여 있다. 온전한 것보다 깨진 것이 더 많던 보도블록도 마법처럼 바뀌었다. 칙칙하고 어둠컴컴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아파트 뒷길에는 거리 헬스장이 들어섰다.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예쁜 철제 펜스를 따라 오솔길도 만들었고, 그 옆에 운동기구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꿈을 키워주는 대전시 '무지개 프로젝트'

'무지개 프로젝트'는 사람을 몰아내는 재건축·재개발이 아니라 낡은 환경을 바꿔서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명 '빈곤동네 재생프로그램'이다. 주민들은 쫓겨날 걱정이 없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질 염려도 없다. 대전시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500억원이라는 돈이 광역시 전체로 보면 변변한 사업조차 할 수 없는 액수지만 특정 지역에 집중 투자하면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규모. 무지개는 이렇게 뜨기 시작했다. 2006년 9월부터 동구 판암동을 1단계 시범지역으로 선정한 뒤 2단계로 서구 월평2동과 대덕구 법동지역을 선정해 2009년까지 80개 사업에 522억원을 투자한다. 올해까지 480억원이 들어가고, 2단계 사업 마지막해인 2009년에 142억원이 투입된다. 무지개 프로젝트 사업대상지는 한마디로 '못사는 동네'다. 기초생활수급자율이 대전시는 평균 3.1%에 그치지만 판암동은 5배가 넘는 15.8%, 월평2동은 14.2%, 법동은 12.9%에 이른다. 동네 주민 100명 중 평균 12~15명이 극빈층이라는 뜻. 기존 정서로 보면, 싹 밀어버리고 깔끔하고 산뜻한 새 아파트를 짓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그런 궁상스런 동네였다.

하지만 '무지개 프로젝트'가 시작된 뒤 마을에는 활기가 넘친다. 대도시 빈민가에서 흔히 보이는 깨진 창문과 보도블록, 지저분한 낙서가 사라지고 생활체육공원과 야외 헬스장, 장애인 이동통로가 확보됐다. 영구임대아파트에는 시가 76억원을 들여 도장·도배·싱크대 교체 등 리모델링 공사를 해주었다. 인근 학교도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해당지역 13개 학교에서 가사실, 도서실, 과학실, 어학실, 컴퓨터실 등을 현대화했고 잉글리시 카페, 잔디구장, 우레탄트랙 등을 새로 만들었다. 낡은 책·걸상도 새것으로 교체해 주었다.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지난 2월 말 판암·월평·법동 지역 주민 1천50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한 결과, 1천5명(67%)이 매우 만족했으며 210명(19%)이 만족한다고 답했다.

내년 1월부터는 '3단계 무지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공모와 선정위원회 심의를 통해 동구 대동과 중구 문창·부사동이 선정됐다. 폐가 땅을 활용해 마을 쉼터와 화단을 만들고, 빈 땅에 마을 꽃묘장 및 꽃동산을 만든다. 또 급경사 계단과 어둡고 꼬불꼬불한 뒷길은 '테마가 있는 골목길'로 바꾼다. 이 밖에 노인공동작업장을 설치하고, 지역사회복지센터를 개보수해서 대동지역 아동센터로 운영한다.

◆꿈을 영글게 하는 '무지개 튜터'

단순히 보도블록을 바꾸고 페인트 칠을 새로 한다고 해서 동네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대전시는 주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로 했다. 대표적 사업 중 하나가 바로 '무지개 튜터'. 튜터(tutor)는 1대 1로 공부를 도와주는 일종의 과외교사인 셈이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과외 봉사활동을 하는 대전시 공무원들이 바로 '무지개 튜터'들이다. 지난해 9월 '무지개 프로젝트' 사업의 하나로 시작했다. 현재 70명이 넘는 대전시 공무원들과 함께 특허청, 식품의약품안전청 일부 직원들까지 이 제도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퇴근 후나 주말, 휴일 등을 이용해 해당 학생의 가정을 찾아가 공부를 도와준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학생들이 판암동 53명, 월평2동 16명에 이른다. 유성구는 별도로 이 제도에 공감해서 무지개 튜터를 꾸려서 운영 중이다. 대전시는 앞으로 신규 임용 공무원에게 3~6개월 무지개 튜터로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무지개 튜터를 담당하는 대전시 임숙향씨는 "튜터 활동을 통해 공직자로서의 봉사정신을 기르고 지역실태도 파악할 수 있다"며 "판암동 저소득층 학생들의 학력이 크게 높아지면서 호응도가 높아졌고, 앞으로 3차 튜터단을 확대 모집해서 대덕구 법동, 중구 등에도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무지개 공무원 봉사단'은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중증장애인을 직접 찾아가 가사도우미 역할을 자처한다. 지난해 8월 11개조 77명으로 시작해서 현재 10개조 97명이 활동 중이다. 소방부서와 보건소, 사회복지직 등 다양한 직종에서 참여하고 있다. 복지관을 찾아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을 파악한 뒤 정해진 주말에 노인무료급식 지원, 홀몸노인 및 중증장애인 식사배달, 빨래와 식사보조, 설거지, 말벗 등 1대 1 가사서비스를 하는 한편 필요에 따라 도배 및 장판 교체 등의 활동도 펼친다.

무지개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자치경영대전'에서 전국 최우수시책, 정책과학회 주관 '뉴거버넌스 리더십'에서 대상을 받았고, 국제지역벤치마킹대회(IRBC), 세계사회복지대회(ICSW) 등에서 우수시책으로 선정되는 등 신개념 복지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무지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대전시 윤종준 사무관은 "단순히 환경만 바꿔주는 사업이 아니라 무지개 축제, 생활체육대회, 봄꽃심기 및 예쁜동네 만들기 등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업"이라며 "살고 싶은 삶터이자 어울려 사는 건강한 삶터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대전에서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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