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극복 수기 당선작] 무궁화 꽃을 떠올리며

입력 2008-10-09 06:00:00

금상/정병율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나는 집으로 향한다. 퇴근시간에 맞추다 보니 노상 밖이 컴컴해져서야 대문 앞에 들어서게 된다. 오늘도 아내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더운 날씨에 돈 버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을 터.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소위 말하는 막일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치는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아내는 아직도 내가 그전 직장에 다니는 줄 안다. 아무래도 아내는 근로조건과 월수입도 꽤 괜찮은 데를 자기남편의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은 까닭에 나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거짓말이나 일삼고 있다.

공사장의 잡부일은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볕 따가운 요즘에는 땀이 절로 난다. 먼지와 소음에 지레 지치기 일쑤고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이 나서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초고층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는 날이면 이곳이야말로 지옥(?)의 앞자락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이 높은 곳에서 좋구나, 하며 뽕짝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쿵, 쿠웅

연이어 터져 나오는 펌프 카의 진동소리가 박자를 맞추고 있었는데 그때는 나는 잠시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티는 공사장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까맣게 잊는다. 내 걸어온 부끄러운 날도, 쓰라린 마음의 고통에서도 일순간에 벗어나곤 했었다. 아내에게는 늘 미안했다. 내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지금도 아내는 다 해져서 너덜너덜한 속옷을 입은 채로 지내고 있으니까. 처갓집 동생들이 쓰는 샘플용 화장품을 얻어 사용해도 아내는 명랑하게 군다. 도리어 아내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내 건강이나 잘 챙기고 다니라며 아침마다 그런다.

탁탁, 와르르, 쨍그렁

이 시간 동료들의 망치소리, 벽돌 나르는 소리, 철근 던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면 내 존재를 새삼 발견하곤 한다. 내 생명도 따라 펄펄 살아 움직이는 걸 느끼는 것이다. 그렇듯이 공사장에서의 하루는 풀풀 날리는 시멘트가루만 마셔대는 것이 아니었다. 참 시간에 동료와 막걸리 잔이 오고가는 그 순간에도 사람끼리의 우애를 느낄 수가 있고, 땀 뻘뻘 흘려가며 배관을 옮기는 슬래브 위에서도 구성진 노래가 들려온다. 그 노래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숨소리를 듣곤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성질도 급한 '희망'이 벌써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어 그러는 건 아닐는지.

이미 아내도 내 행색에서 실직을 눈치 챘지 싶다. 그렇다면 아내는 왜 내게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을까? 한편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설마 아내가 내 자존심까지 헤아려주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말이다.

정말 아내는 내게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간의 자초지종을 다 아는 듯이 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예전보다 내게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게 '힘'이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 이 시간에도 나는 기지개를 켜가며 망치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로소 이 공사장 안에서 깨달았다. 치열하기까지 한 현장에서 '가장들의 눈물'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를 배웠고, 용쓰고 난 뒤에 먹는 막국수 한 그릇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세상이 내 것 갈았고, 리프트 작동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이내 동심으로도 돌아간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도 잠시, 나는 뙤약볕에서 일하다가 평소부터 앓고 있던 고혈압과 허리통증으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몸도 야윈 난데, 나로서는 이제 중노동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일 년 가까이 방안에 드러눕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가 가정을 도맡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는 그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선천적으로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아내라서 집에서 설거지도 겨우 할 판에, 복지관에 나가 잡일을 하는 것을 보면 연방 가슴이 아파왔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겨우겨우 끼니만 연명해가며 살았는데 도저히 이대로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빚을 내서 장사에 뛰어들었다.

아파트상가지하에서 비디오가게를 개업했는데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한 덕분인지, 처음에는 매상도 괜찮았다. 늘 병자 같았던 아내의 얼굴에도 차츰 화색이 감돌았다. 모처럼 우리 가족은 웃음꽃을 피웠고 아이를 데리고 외식도 다녔다.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해쯤이 흐르자, 주변에 대형매장이 들어서고 손님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쟁심만으로 조금 벌어놓은 돈을 재투자해 점포를 확장했고, 나중에는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미 발길을 돌린 손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점포를 내놔도 인수할 사람도 없는 걸 보니 나로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종내에는 더 이상 현상유지도 할 수 없어 업자한테 공짜다시피 물건을 넘겨버렸고, 월세만 까먹고 있는 빈 점포는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로 내주고 말았다.

이제는 의욕마저도 사라져갔다.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눈만 감고 있었고 아내 역시도 그 사태가 어이가 없었던지,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양식도 떨어져 결혼패물이나 아이의 돌 반지를 팔아가면서까지 연명하곤 했었다. 심지어는 자식한테 제대로 입힐 옷조차 없어, 딸아이가 시내에 놀러갔다가 또래에게 거지 취급까지 받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 순간 정말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내 무능력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세월을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보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저버린 채 말이다.

어느 날 딸아이가 내게 그랬다.

"아빠, 나 용돈 떨어진 지 오래야! 다른 아빠는 친구들한테 용돈도 잘 준다던데……"

그 말을 듣자 마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나는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돼가지고 자식에게 용돈 한 푼 쥐여주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부모자격'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여태껏 나는 아내와 딸아이를 말로만 사랑했을 뿐이지, 그것을 행동으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그동안 '상록복지관'에서 시간제로 일하던 아내는 재차 의욕을 가지는 내 모습에 제일 먼저 반가워했다. 아내는 자신도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여러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참용기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나는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용역회사에 구직등록을 했더니 경비직을 권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도 아니고 해서 나는 곧장 그 일에 뛰어들었다.

내 근무지는 성서공단에 있는 전자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첫 출근부터 당장 모자를 쓰고, 호루라기를 차고, 발걸음도 씩씩하게 근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보람도 생겨났다. 이를테면 산업발전에 내 한 몸도 일조한다는 그런 것! 주로 수출용 LCD를 만드는 우리 회사는 용차나 컨테이너가 많이 왕래했다. 자연히 차량정리에도 신경써야 하고, 3교대 근무체제라 직원들도 쉴 새 없이 왕래하곤 해서 나 또한 덩달아 바빴다. 불황이라곤 전혀 모르는 회사에서 일하는 나는 그만큼 긍지를 가지게도 되었다.

점차 나는 활기를 되찾아갔다. 파견직이라 비록 월급은 쥐꼬리만 하지만, 내가 '직업'을 가졌다는 게 무엇보다 신났던 것이다. 잔돈푼에 불과하지만 떳떳하게 나는 딸아이에게 용돈도 주었고, 아내의 속옷이며 립스틱을 선물하게도 되었다.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된 나는 어깨 으쓱거리면서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댔다.

그 호루라기의 위력 또한 대단(?)했다. 숱한 납품차량들이 질서를 어기다가도 그 호각소리에 깜짝 놀라 멈춰 섰고, 직원들은 금연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얼른 꺼버리곤 하였다.

적어도 나는 이 큰 회사의 지킴이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소임을 다해 근무할 수밖에는!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확연하게 가정 분위기도 밝아져갔다. 부드러운 대화와 웃음이 절로 넘쳐났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가족의 기도 덕분인 것 같다. 내가 아파할 때 곁에서 위로해주곤 했던 아내와 딸아이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삶이란 그런 건가 보다. 절망 너머에는 분명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고, 그 과정들이 다름 아닌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고 보면 여태껏 내가 아파하며 걸어온 길도 바로 '조물주의 사랑' 때문이 아닐는지. 아닌 게 아니라 숱한 고통도 따랐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잘못도 있기 마련이고,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할 사정 또한 생기는데 그걸 두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고로 머리가 빈 사람이 허풍만 살아있고 또 빈 수레가 시끄럽다고 하질 않았던가. 원래 그 한 사람의 가치란 남이 먼저 인정해줄 때 그것이 진실한 것일 터. 더욱이 내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일부 사람들의 그 무시하는 시선은 견디기조차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자연히 나는 내 삶에 어떤 오기랄까,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랬다. 아직도 살림살이야 하나도 나아진 것은 없지만 마음 하나만큼은 철저히 무장이 된 나는, 험준한 계곡 고비마다를 힘차게 헤쳐 나갈 자신감도 생겨났다. 내 옆지기인 아내랑 그리고 부쩍 커버린 아이와도 함께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내 이런 행동도 가족의 믿음 덕분이었다. 내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는 우리 가족이 있기에 어떨 때는 참 행복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기나긴 실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용역회사라도 좀 나은 조건에 있는 자동차부품회사(달성공단의 S사)의 경비직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상여금이나 자녀 학자금지원 등 복지혜택이라곤 전혀 없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위안이 되었다. 요즘은 일을 하고 싶어도 직업이 없어 노는 실업자가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그것도 젊은 고학력자들도 쉽게 어디 직장을 못 구해서 쩔쩔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고급인력을 활용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은 나라전체의 손실이기도 하리라.

아무래도 나는 행운을 잡은 모양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우선 내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니, 가족도 어째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믿기지도 않았다. 장애자인 아내가 뇌성마비 아이를 가르친다는 그 자체가 말이다. 우리 구청의 소개로 아이들에게 전공인 미술을 가르치고, 또 어떤 날은 구슬장식을 만들거나 서예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서 네 시간씩 하는 아르바이트 수준이긴 했지만 결코, 아내로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일 텐데 끝까지 고집을 내세워 다녔다.

하루는 아내가 말했다.

"가들이 진짜 천삽미데이!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색안경 끼고 보는 기 더 이상하이 느끼지는 기라. 당신은 안 그렁교?"

그 순간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아내가 더 천사같이 여겨졌었다. 아내는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큰딸아이도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중견기업에 취업이 되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이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는 우리 가족의 기도에 힘입어 무난하게 통과를 했던 것이다.

볕이 쨍쨍 내리쬐는 요즘이다. 이젠 우리 가족의 앞날도 그렇게 찬란하게 펼쳐지리라. 왜냐하면 가장인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 그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할 터이므로. 비로소 내 삶도 어떤 여유로움으로 넘쳐나리라. 통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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