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줌인하다…세계 보도사진의 큰 별 김희중

입력 2008-10-04 06:00:00

사진은 기록이다. 찰나의 순간에 담긴 진실은 수만 구절의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준다. 사진 저널리즘은 현실과 가장 가깝게 표현되며 기사의 진실을 증명한다. 수많은 역사의 현장은 사진으로 기록되고 머리 속에서 이미지화된다.

김희중(68) 상명대 석좌교수는 국내 사진 저널리즘의 큰 별이다. 경기고 재학 중이던 17세에 이미 개인전을 두 차례나 열었고, 1973년 서방 기자로는 최초로 북한을 취재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편집팀장에 오르기도 했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대구 국제사진비엔날레의 조직위원장을 맡은 그를 지난 1일 서울 잠실에서 만났다. 그는 작업실에서 비엔날레에 전시될 작품들의 프린트를 바닥에 늘어놓고 전시관 배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6개월 전에 언어중추를 관장하는 혈관이 막혀서 말이 어눌합니다." 느리게 천천히 카메라와 조우했던 54년 전부터 기억의 사진들을 꺼내보기로 했다.

◆뷰파인더로 만난 새로운 세상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할 즈음, 아버지가 그를 불러 앉혔다. 아버지는 벽장에서 곱게 보자기에 싸여있던 물건을 꺼냈다. 독일제 롤라이코드 카메라. 아버지의 애장품이자 가족들은 손도 못대게 하던 보물 1호였다. "이게 뭐하는 물건인 줄 아느냐?" 모를 리가 없다. "사진을 찍는 기계입니다." "그냥 사진 찍는 기계가 아니다. 마술상자다. 방학 동안 이 마술상자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아봐라." 아버지는 필름 몇 통을 쥐여주고는 조리개와 셔터 만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선 친구들과 가족들을 찍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니 도저히 찍을 게 없었다.

'사진을 찍을 거리가 뭐 있을까 찾아보자'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동네로 나섰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풍경은 그냥 풍경이 아니었다. 뷰파인더 넘어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동네 어귀 자전거 수리점 아저씨의 한쪽 귀가 더 크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광경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새댁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었다.

소년은 카메라에 빠져들었다. 중3 때 이미 일간지에서 주최한 독자사진전에서 '여장부'라는 작품으로 대상도 받았다. 주말이면 서울과 경기도까지 쏘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를 졸라 집 뒤쪽에 암실도 만들었다. 경기고 2학년 시절인 17세 때는 개인전을 2차례나 열었고 15만명이 관람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천재'라고 불렀다. 그래도 사진을 평생 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카메라가 보여준 세상은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는 사진가라는 직업이 없었어요. 부모님은 판·검사나 박사가 돼야한다고 했고, 8남매 중에 큰형이 전쟁 통에 전사한 터라 내가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어요." 유명인사가 된 그 해 그는 낙제를 했다. 사진 찍으랴, 전시회 준비하랴 다니면서 출석 일수가 크게 모자랐던 탓이었다. "나는 내 능력을 믿었으니 상관이 없었는데 가족들의 실망이 대단했죠." 지금도 그는 그 당시 찍었던 사진들을 최고로 꼽는다. "구도나 인물배치가 완벽해요. 또 그 당시에는 순수하게 찍은 사진들인데 비해 지금은 욕심이 많아져서 자꾸 연출을 하게 돼요. 진실을 표현하는 데는 오히려 지금이 못한 셈이죠."

◆꿈을 찾아 미국으로

그는 1959년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유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1950년대 한국은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젊은 사람이 꿈을 가지기에는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자원도 없었고 사회도 불안했어요." 그의 전시회를 찾아왔던 주한 미국대사였던 다우링씨와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김희중이 뉴욕대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소개를 해주었고 그의 미국식 이름인 '에드워드'도 지어줬다.

1960년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부푼 환상에 차 있던 그에게 미국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백인들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방황이 이어졌다. 1년간이나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았다. 방황은 무기력함을 낳았다. 꿈을 이룰 수 없는 세상, 그는 손목을 긋고 단절을 시도했다. 그가 시계를 풀고 왼쪽 팔목을 보여줬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는 흉터. "오죽하면 자살을 시도했을까요. 그래도 상처를 볼 때마다 그때 죽지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극심한 생활고를 겪던 그는 미국 타임사에서 발행하는 사진 잡지인 '라이프지'를 무작정 찾아갔다. 당시 사진 편집인 레스터와의 만남도 큰 인연이었다. 레스터는 그가 사진을 직업으로 택할 수 있었던 결정적 조언자가 됐다. "제 사진을 보고는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심리학을 공부하느냐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과연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죠." 자유롭게 여행을 즐기는 것,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 것.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레스터는 텍사스 주립대의 오사 스펜서 교수를 추천했다. 사진 저널리즘에서 세계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스펜서 교수는 대학 졸업 후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하려던 그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달라스 모닝 뉴스라는 지역지에서 제안이 들어온 상태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앞길이 열린다는 스펜서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어요. 그가 추천해 준 곳이 사진 저널리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덤 교수가 있던 미주리 주립대였어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라이프', '룩'과 함께 사진 저널리즘의 3대 매체로 꼽힌다. 기사와 사진도 최고 수준이고, 독자의 신뢰도 '성경 다음으로 믿는 곳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 불릴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공채 시험도 없었다. 도전해보기로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1년 전, 그는 무작정 내셔널 지오그래픽사를 찾아갔다. "제가 내년이면 대학원을 마칩니다. 그러니 저를 써 주십시오." 대답은 당연히 'no'였다. "제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꼭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이듬해 가을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참신한 젊은 기자를 쓰기로 하고 그에게 연락을 해온 것.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입사 이후였다.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상대를 안 해주더군요. 유색인종 자체가 거의 없었던 데다 애송이니 거의 3개월간 아예 투명인간 취급받았죠. 결국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어떤 회사인지 연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1888년 창간호부터 1967년까지 80년간 발행된 모든 기사와 사진을 탐독했다. 다 읽는데만 1년이 넘게 걸렸다. "한번 탐독을 하고 나니까 기사의 취지와 방향, 목적을 알 수 있었어요. 알고 나니 쉬워졌죠." 그의 첫 취재는 입사한 지 2년 뒤에야 지면을 장식했다. 펜실베이니아 쿠즈 타운의 독일 이민자 종교집단인 '아미시 피플(Amish People)'이 첫 주제였다. "1년 간의 취재 끝에 기사화 됐는데요. 거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죠. 의욕도 막 커졌고요." 하지만 최고가 돼야 했다. 능력있고 좋은 집안에 재력까지 뛰어난 백인 직원들 속에서 유색인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찾아낸 주제가 '북한'이었다.

◆성공=x+(3×노력)+열정+애정-욕심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흥미를 가졌는데 누가 시도해도 답변조차 못받았어요. 회사에 만약 내가 허가를 받으면 보내줄 수 있느냐고 큰소리를 쳤어요. 그런데 이북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명도 없었으니 난감했죠." 1972년 편지를 썼다. 러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6개월 만에 답장이 왔다. 취재 허가는 아니었고 '당신의 인적사항과 어떤 잡지인지 설명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답장을 보내고 다시 6개월을 기다렸다. 10월부터 12월까지 두 달간 취재를 할 것이라 통보를 했지만 여전히 가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무작정 모스크바로 갔다. "만약 모스크바 공항에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나오면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아무도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1973년 9월 그는 모스크바 공항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탑승객들이 모두 빠져 나간 뒤, 기둥 뒤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 2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워싱턴에서 오신 김 선생님이 맞습니까? 오지 말라는 정보 못 받았습니까? 조선 취재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일단 늦었으니 호텔에서 쉬시고 내일 돌아가십시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떼를 썼다. "저도 체면이 있지 회사에 북조선에 간다고 얘기를 해놓고 성과도 없이 돌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제가 평양에 편지를 쓸테니 전해주십시오."

그는 취재 기간을 한달로 줄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며칠 뒤 여전히 안 된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편지를 썼다. 그렇게 1주일, 호텔에 갇히다시피 지낸 뒤에야 대사관 직원들이 찾아왔다. "그날 저녁을 함께 먹고 다음날 평양으로 들어갔어요. 서방 기자로는 최초였죠." 이를 계기로 그는 퓰리처 상에 버금가는 미국 해외취재기자단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회사는 그에게 불가능할 것 같은 취재들을 맡겼고, 그는 성공을 거뒀다.

1980년 그는 동양인 최초로 편집팀장의 자리에 올랐다. 임원 자리였다. 특히 편집팀장은 사진 선택, 기사 분량 조절, 지도제작, 미술 파트까지 담당해야하는 가장 권한이 막강한 자리였다. 1985년까지 4년 8개월간 그는 편집팀장 자리를 지켰다. 그는 성공의 공식을 'x+(3×노력)+열정+애정-욕심'이라 정의했다. "x는 자기가 즐기면서 평생 할 일입니다. 거기에 3배의 노력을 하며 열정을 더하면 애정이 생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을 최소한으로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는 1985년 25년간의 미국 생활과 18년간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일할 수 있고, 땀을 흘릴수 있을 때에 돌아와야지 세금도 안 내고 은퇴한 다음에 돌아온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을 보여줘야 죽어서도 조국 땅에 묻힐 수 있다고 생각했죠." 타임지 서울특파원으로 일하며 한국 홍보책자인 '한국화보'를 1998년까지 제작했다.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린 공로로 1994년 국민훈장 동백장도 받았다. 2003년부터는 상명대 석좌교수로 후학을 기르고 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장기훈 프리랜서 zkhaniel@hotmail.com

▨ 김희중은?=1940년 서울 출생. 경기고 2학년에 두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1960년 미국으로 건너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입사했고, 1974년 서방기자 최초로 북한을 취재했다. 1980년 동양인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편집팀장이 됐다. 1985년 귀국해 '타임'지 서울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홍보기획공사 대표, 이화여대 초빙교수를 지낸 뒤 2003년부터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 전미 해외기자단 최우수 취재상(1974),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단 사진취재상(1978), 미국디자인협회 편집기획상(1983)도 받았다. 국내에서도 제1회 이명동 사진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는 국가 홍보에 기여한 공으로 국민훈장 동백장도 수여했다. 이달 30일부터 열리는 대구 국제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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