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일본의 베니스 '야나가와'

입력 2008-10-02 14:15:24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후쿠오카에서 40여 분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야나가와'라고 하는 일본 소도시의 작은 역이었다. 역내 관광안내소 앞에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잠시 후 승합차 한 대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가 빨간색 아치형 다리가 있는 소박한 강가에 내려놓는다. 차에서 내린 뒤 잠시 다리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물에 너울거리는 배들과 고풍스러운 시골집들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풍경에 감탄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야나가와에 온 건 그 친구의 아이디어였다. 인터넷에서 여행정보를 뒤져 A4용지를 한 뭉치나 들고온 친구는 '다자이후 야나가와 간코깃푸'라는 것을 찾아냈다며 흐뭇해했다. '다자이후 야나가와 간코깃푸'는 일본의 고성이 있는 야나가와 인근의 '다자이후'란 도시와 '일본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물의 도시 야나가와를 묶어서 여행할 수 있는 1일여행권이다. 왕복기차표와 뱃놀이 승선권이 포함된 이것은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의 교통비를 관광객들에게 할인해주는 제도인 셈이다. 1일여행권에는 기차표 뿐만 아니라 야나가와에서 유명한 장어찜 식사 할인권, '오하나'라고 하는 에도시대 저택 입장할인권 등이 포함돼 있었는데, 마치 그 곳에 가면 무얼 해아햐는지를 다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를 따라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금 시큰둥했다. 나는 '어떻게 찾아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가 정해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고 느끼는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 느끼게 되는 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작은 거룻배에 올라 야나가와의 아름다운 물길을 가로질러가는 순간 나는 금세 이곳으로 데려와준 친구에게 감사해야만 했다.

강변의 오래된 일본식 집들에는 이끼가 끼어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좁은 물길이 운치있게 구불구불 휘어져 있다. 이렇게 마을 전체를 휘감고 도는 물길이 470㎞나 이어져 있다고 한다. 물길을 따라 이 고장의 명물인 '돈코부네'라고 불리는 거룻배가 다닌다. 사람들이 야마가와를 찾는 이유는 모두 돈코부네를 타보기 위해서이다. 일본 전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만 매년 100만명이 넘고, '도쿄맑음'이란 영화에서 나카야마 미호(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으로 유명)와 다케나카 나오토('셀위댄스'에서의 익살스런 연기로 유명했던)의 신혼여행지로 알려진 이후 한국인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

돈코부네가 지나가는 수로(水路)에는 군데군데 낮은 다리가 걸려있다. 뱃사공 아저씨가 일본어로 "머리 숙여요!"를 외치면 배를 탄 사람 모두가 다함께 납작하게 엎드린다. 때때로 낮은 다리가 꽤 길어지면 우리는 납작 숙인 자세로 한참을 버텨야 한다. 그때마다 뱃사공 아저씨는 다리 아래 울리는 소리의 공명을 이용해 '엔카(일본식 트로트가요)'를 불러준다. 야나가와는 이탈리아의 베니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친구의 고향마을을 찾아온 것 마냥 편안하고 서정적이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창문을 열면 언제나 돈코부네가 지나가는 수로 위의 작고 예쁜 집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마냥 신기했다. 배를 탄 방향에서는 볼 수 없는 저 집의 반대편 현관과 앞마당, 그리고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나는 배에서 내리면 꼭 저 집들 속으로 잠입해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탄 돈코부네가 오늘 마지막 배라는 것이었다. 함께 뱃놀이를 한 사람들은 모두 돈코부네 종착역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간다고 했다. 셔틀버스를 놓치면 기차역까지 몇 시간을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친구가 서둘러 버스를 타자고 했다.

"너 돌아가는 길 알아? 헤매다가 해 지고 컴컴해지면 어떻게 하려고?"

마을을 구경하고 걸어서 가자는 내 고집에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셔틀버스는 곧 출발할 기세였고 우리는 짧은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수로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어지러운 외국의 낯선 마을에서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단둘이 밤길을 헤매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기차라도 놓치게 되면 예정에도 없는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야만 한다. 셔틀버스 기사가 우리를 향해 경적을 울렸다. 이제 몇 초 안에 결정해야 한다.

나는 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일본의 작은 시골마을을 뿐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게는 보이지 않은 저 마을의 속살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마냥 흥미로워 보였다. 인생의 흥미진진한 비밀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한 발짝을 더 내딛기에 주저하는 순간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는 바로 우리 곁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한발짝만 더 내딛으면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요괴마을로 행방불명된 치히로처럼 뜻밖의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버스는 우리를 남겨두고 출발해버렸다. 노을이 내리기 시작한 낯선 나라의 수상한 오후, 친구와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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