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만에 만난 옛 연인…영화 '멋진 하루'

입력 2008-09-27 06:00:00

헤어진 연인이 1년 만에 만났다.

그러나 여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한다. "돈 갚아!" 350만원. 누구에겐 푼돈일 수 있지만, 이 여자에게는 큰돈이다. 헤어진 남자를 찾아가 그 돈을 갚으라고 할 때는 얼마나 절박했을까.

나이 서른을 넘겼다. 애인도 없고, 직장도 없다. 딱히 마음 붙일 곳 없는 차가운 표정만큼 세상을 보는 시선도 차갑다. 그녀의 이름은 희수(전도연)다.

초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어느 토요일 일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몇 차례 사업 실패, 지금은 전세금까지 빼 길거리로 나앉은 신세다. 달랑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 갈 곳도 마땅찮은 그에게 350만원은 큰돈이다. 그의 이름은 병운(하정우)이다.

그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돌려막기'를 시도한다. 희수는 병운을 태우고 다니며 돈을 꾸러 다닌다. 내 돈 내가 받는데, 불편한 심사는 뭐지?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는 최악의 하루를 예감하며 시작된다. 마음의 문이 꼭꼭 닫힌 여자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실없이 사는 남자의 하루 동안의 불편한 동행이 줄거리다.

이윤기 감독은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음의 역동을 끌어낸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간대별로 나열된 이야기에서 긴장미를 포착하고, 이를 관객의 가슴 속에 서서히 주입시킨다.

밑도 끝도 없이 '내 돈 내놔!'라는 식의 도입에서 이미 둘의 예리한 충돌을 상정한다. 이기적이며 분별력 있는 여자와 사람만 좋지 대책 없이 사는 남자는 한때 연인이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너 갈치조림 좋아했잖아. 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 "내가 언제?" "너는 내 오른쪽 얼굴을 좋아했어. 그래서 늘 왼쪽에서 걸었는데" "……." 둘의 대화는 늘 어긋난다.

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도 긴장의 연속이다. 사업 수완이 좋은 여자 사장의 은근한 눈빛, 남자를 오빠처럼 따르는 술집 여자의 당찬 도발에 희수는 늘 코너에 몰린다. "내 같으면 주고 말지!"라는 말에 "내 돈"이라고 발끈하지만, 이미 설득력은 없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이 영화는 완벽하게 계산된 동선과 카메라의 시선으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낸다. 어긋버긋한 둘의 감정을 건물 유리에 투영된 실루엣으로, 또 차창 유리벽 너머, 간혹 길 건너에 두고 지켜본다. 보일 듯 말 듯하던 둘은 차츰 안정된 톤으로 카메라에 잡히며 자연스럽게 감정까지 공유한다. 희수가 병운을 찾아가면서 좁은 골목길에서 보여주는 롱테이크는 희수와 병운의 두 개의 막막한 평행선을 은유하고 있다.

특히 두 배우의 연기가 스크린을 압도한다. 전도연은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깍쟁이이자 '헛똑똑이' 희수를 특유의 찌를 듯한 눈빛으로 연기하고, 하정우는 세상 편하게 살아가는 병운을 편한 웃음으로 잘 연기하고 있다.

이윤기 감독이 이 영화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관계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관계로 이뤄진다. 연인이든, 친구이든, 연적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마치 일식과 월식 같아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찌그러질 때는 갈등이 생기고,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러나 일식과 월식의 그림자는 바로 자신이다. 나로 인해 그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다. 희수가 차츰 병운의 원래 얼굴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이런 인식이다. 돈을 꾸러 다니며 만나는 다양한 군상들도 차츰 이해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문을 연다. 감독의 문제의식과 치밀한 카메라 워크, 뛰어난 연기가 어우러진 칼칼한 영화다. 특히 끝까지 차분하게 밀어붙이는 감독의 냉정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멋진 하루'는 깊어가는 가을날 보면 좋을 감성 멜로영화다. 바람난 것 같던 한국 영화판에 오랜만에 만나는 '멋진 영화'이다. 12세 관람가. 123분.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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