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46)에게는 특별한 DNA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외계에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의학박사, 공학석사, 경영학석사,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 국내 최고 소프트웨어 기업의 최고경영자, 카이스트 석좌교수 등. 남들은 하나도 이루기 힘든 성과들을 그는 모두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일궈냈다. 20년간 구설수 한번 없었고, 그를 폄훼하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름'을 만나러 지난 16일 오전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을 찾았다. 기자가 들어섰을 때 그는 탁자에 앉아 영문 프린트 자료를 보고 있었다. 책이 꽉 들어찬 책장과 정돈된 책상, 단정한 외모와 치열한 삶. 묘하게 어울렸다. 그는"한국에 돌아온 지 4개월이 됐지만 아직 짐도 다 못 풀었다"며 멋쩍어했다. 아직 못 풀어낸 책이 두 상자가 더 있다고도 했다. "책이 많은가 봐요?" "1천권쯤 되더라고요. 다 읽지는 못했어요. 틈틈이 책을 읽는 편인 데 1주일에 평균 2권쯤 보는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시종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가 간간이 얼굴에 웃음을 그린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도 가끔은 농담을 할까?
◆나는 게으른 사람
-의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CEO에서 대학 교수로 변신하셨죠. 각각의 계기가 뭐였습니까?
"의사였던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학창시절엔 의사가 천직이라고 믿었어요. 의대 대학원 시절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일을 계기로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7년 동안 의사일과 병행하면서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고 나머지 시간에는 의사로 살았죠. 그러다 백신 엔진을 개발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의사를 그만뒀어요. 회사가 소프트웨어 회사로는 최고가 되니까 이제는 산업 전반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더군요. 그런데 남들을 도와주려면 자신부터 체계화돼야 하잖아요. 공부가 필요하다 싶어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MBA석사 과정을 다시 밟았어요. 그리고 카이스트 교수로 오게 된 거고요. 제가 풀타임 정교수인 데 임기가 2027년까지에요. 임용장을 보면서 '과연 내가 그때까지 교수를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별로 연관성이 없는 직업들이네요.
"사실 제가 철저하게 장기 계획을 세우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매 순간 하던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전혀 새로운 길로 오게 된 거죠. 저는 일을 고를 때 항상 일 자체만 봐요. 사람들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망설이는 이유가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기 때문인데요. 저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 또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지, 무엇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지만 고민했어요."
-뛰어드는 일마다 성공을 거뒀는 데 주변의 시기나 질시를 받지는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자랑을 안 하는 편이에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저는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징후 중의 하나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단점이 내 단점보다 커 보일 때라고 봐요. 그래서 늘 방심할까봐 경계를 하는 편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이의 비교'가 아니고 '어제의 나와 오늘 나와의 비교'라고 생각해요."
-본인의 생활습관이나 성격, 태도들 중에서 고치고 싶은 점이나 단점이 있나요?
"제가 게으른 편이에요. 마음 편하게 사는 걸 좋아해서 마음이 풀리면 좋아하는 소설책만 하루 종일 보거나 천장을 보면서 백일몽을 꿔요. 그래서 제가 쓰는 수법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거예요. 의대 대학원 시절에는 제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칼럼을 쓰겠다고 일부러 약속을 하고 고생해서 글을 썼어요. CEO를 그만두고 공부를 결심했을 때도 아예 석사 학위 과정으로 갔어요. 토플 시험도 새로 보고 GMAT(경영대학원입학시험)도 치고. 후회도 많이 했어요. '내가 숙제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나이가 아닌데 뭐하고 있나.' 그래도 'no pain, no gain'(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말처럼 고생한 만큼 남더라고요."
◆대형 포털의 횡포가 벤처의 씨를 말린다
-따님도 공부를 잘 한다고 들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철학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요.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절대로 크지 않아요. 오히려 자녀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주변 환경과 친구들이거든요. 결국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환경을 바꿔주고 역할 모델이 되는 거죠. 부모님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죠."
(안철수·김미경(45) 부부는 현재 나란히 카이스트 교수로 일하고 있다. 성균관대 부교수(병리학)였던 부인 김씨는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 법대와 스탠퍼드대 법대에서 생명과학 연구과정을 마쳤고,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엄마를 따라 미국에서 공부한 외동딸(19)은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무엇이었나요?
"부모님은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거의 안 하셨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신문배달 소년을 무료로 치료해줬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었죠. 또 아버지는 진료가 없을 때는 항상 책을 보고 계셨어요. 거의 다 일본 소설책이었지만요. 50세가 넘어서도 가정전문의 시험을 쳐서 합격하셨고요.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제게 존댓말을 하셨어요. 워낙 익숙해져서 나중에서야 존댓말이었단 걸 알 정도였죠. 그래서인지 저도 뒤늦게 공부도 하고, 어린 신입 여직원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군에 가서도 사병들에게 반말 못해서 고생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벤처 기업이 위기를 겪는 이유가 뭐라고 보세요?
"무엇보다 실력과 자질이 부족해요. 인프라도 엉망입니다. 대기업 위주의 거래 관행도 문제예요. 구글(Google)을 보면 수 많은 벤처기업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구글은 이를 활용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하는 비즈니스모델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형 포털 등의 횡포에 벤처의 씨가 말라버립니다. 벤처기업이 이익을 내도 '단가 후려치기' 같은 방식으로 이익을 빼앗아버리니 점점 설 땅이 좁아지는 거죠."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장에만 매달리는 20대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이 모험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회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안정 지향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모험의 성공 확률은 낮은 반면, 실패했을 때 치러야할 부담이 너무나 커요. 한국에서 기업하다 망한 사람이 재기하는 건 너무나 힘듭니다. '대표이사 연대보증제도'때문인데요. 미국에서는 승산이 없는 사업은 CEO가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 사업을 포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 경영자는 포기를 못해요. 사업을 접는 순간, 회사 빚이 개인 빚이 되거든요. 그러니'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버틸 수밖에 없죠."
◆보안은 인식과 문화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와 네티즌이 엇박자를 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네티즌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고발이 잇따르고 건전한 토론 문화를 막는다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보수든 진보든 이데올로기를 논한다는 자체가 시대착오예요. 21세기 세계를 움직이는 키워드는 탈 권위주의입니다. 20세기까지 인터넷이 제한된 계층이나 일부 전문가들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나눠줬습니다. 반면 21세기에 나타난 웹 2.0은 대중이 힘과 지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와 공유를 하거든요. 개인의 가치가 이데올로기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된 거죠.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보수이든, 진보든 오래 못 갈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인 정보 유출 사태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GS칼텍스의 고객 정보가 통째로 유출되기도 했고. 'IT강국'을 자처하는 우리나라가 전 세계 보안위협 발생 1위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는데요.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미국 유학 시절에 동네 주민들이 거의 60세 이상 노인들이었어요. 동네 사람들 모두 무선인터넷을 쓰는데 100%가 비밀번호를 걸어놓습니다. 한국은 안 그래요. 무선 인터넷 대다수가 비밀번호를 걸지 않거든요. 이건 심각한 위험불감증입니다. 사람들은 보안이라고 하면 기술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보안은 문화의 문제이자 인식의 문제, 습관의 문제입니다. 기술과 투자는 그 이후에요. 결국 인식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이런 사건이 벌어질 거에요. 최소한 3~5년은 반복될 겁니다."
-올해 안철수연구소에 여러 악재들이 겹쳤습니다. 무료 백신 시장도 급속도로 커졌고 V3의 윈도스 XP 오진 사태로 신뢰에도 상처를 입었고요. CEO가 사임하기도 했는데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처럼 구원투수로 나설 생각은 없나요?(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1985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애플이 위기에 빠지자 10년 뒤 경영에 복귀, 애플의 부흥을 이끌었다.)
"저는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나쁘다고 보진 않아요. 매출은 늘었고, 주요 고객인 기업고객 매출도 줄지 않았고요. 사실 오진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에 대응을 참 잘했더라고요. 쉬쉬하지 않고 한 명의 피해자라도 줄이기 위해 보도해달라고 방송국에 부탁까지 했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창업 정신이 아직 살아있구나. 희망이 있다. 만약 돈에 눈이 멀어 창업 정신이 변질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서 바로 잡아야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안철수는?=1962년 부산 출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자신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아예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버린 화끈한(?) 사람이다. 안철수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의 대명사 'V3'를 만들어 혼자 무려 7년동안 무료로 배포했다. 1995년 단국대 의예과 학장도 내던지고 '컴퓨터 주치의'로 변신,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고 2005년까지 CEO로 일하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표이사직을 내던진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경영자 MBA 과정을 마치고 지난 5월 귀국했으며 현재 카이스트 석좌교수와 안랩 최고학습책임자(CLO)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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