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속에도 이익보는 사람들이 있다?

입력 2008-09-06 06:00:00

서민들 물가에 비명지를 때 누군가는 웃고 있다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가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최근의 물가 상승은 국제 원자재 가격 폭등이 단초이다. 천정부지로 솟던 국제 원자재 가격은 투기 세력의 철수 이후 비교적 큰 폭의 하락 국면을 맞고 있다. 인플레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 많이 해소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올라간 소비자 물가는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인상 뒤에 인하는 '나몰라라'

인플레로 모든 경제 참여자들이 고통받는 것은 아니다. '뒤에서 웃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정비업체를 찾은 A(45)씨는 지난해보다 2배 이상 가격이 올랐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해당 부품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 가격의 인상 때문에 메이커 측이 부품값을 올렸다는 설명이었지만 A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해당 부품을 만드는 원자재 값이 지난해 크게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올 들어 많이 내렸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A씨는 "메이커들은 인상 요인이 발생하면 소비자 가격에 득달같이 반영하면서, 정작 인하 요인이 발생하면 모른 척한다. 인플레를 틈탄 바가지를 쓰는 느낌"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동차 이용자들이 유가에서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국제유가(WTI 기준)는 지난 7월 11일 배럴당 146.30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9월 1일 현재 115.46달러로, 30달러 이상 하락했다. 그러나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휘발유·경유값은 국제유가 하락세가 시작된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전자들이 가격 하락 효과를 피부로 느끼기까지는 한 달 정도가 더 걸렸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가격 인상을 할 때만 민첩하고 내릴 때는 거북이걸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는 나름대로의 해명을 내놓고 있다. 국제원유가격의 시세 변동은 2, 3주 지나야 국내 공급가 및 소비자 가격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선적일, 환율, 원유 확보량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주유소 공급가가 정해지기 때문에 그만큼 주유가격 변동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항공료에 붙는 유류 할증료의 경우 국제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계속 오르다가 11월이나 되어야 내려갈 전망이다. 유류 할증료와 국제 유가 사이의 연동에 이처럼 긴 시차가 생기는 이유는 고유가로 인한 항공사의 경영난을 덜어주겠다며 정부가 평균 유가 적용 기간과 고지 기간을 각각 1개월씩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라면, 과자 등 생필품값의 인상을 이끈 국제곡물가격 또한 크게 내렸지만, 소비자 가격이 내렸다는 소식은 없다. 국제곡물가격은 지난달 초와 비교했을 때 소맥 12.1%, 옥수수 30.7%, 대두 23.7%나 떨어졌다.

◆인플레로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다

식음료 업체들은 올 상반기 매출, 특히 영업이익 증가폭이 몇배나 높아 "원가 상승분 이상의 인상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고 있다. 식품업체인 S사는 식용유 등 소비자판매가격을 올린 덕분에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61.13% 증가했는데, 영업이익은 무려 311.23%나 폭증했다. 또 다른 식품업체인 O사도 매출이 22% 상승에 영업이익이 53.06%나 늘었다. P사는 매출이 4.3% 증가하는데 그친 반면 영업이익은 무려 76.6%나 뛰었다.

환율 인상으로 서민들이 물가 고통을 받는 동안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 재벌기업들은 환차익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27조9천772억원의 수출액을 기록,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조354억원이 늘어난 액수다. 위의 기업들은 환율이 10원만 올라도 연간 수백억~수천억원의 환차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은 지난달 시민사회신문 기고에서 "현재의 경제난이란 것은 이건희, 이재용, 정몽구 돈 벌어주자고 날품팔이 운수노동자, 라면 먹는 노인네들 때려잡은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9월 위기설이 나돌 정도로 한국 경제는 경보음을 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성장 7%, 소득 4만달러, 경제규모 7대 경제대국을 약속한 '747 공약'이 '물가상승 7%, 경제성장 4%, 지지율 4%'라는 비아냥 소리가 널리 퍼질 정도다. 정부는 경제난의 원인을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 및 세계 경기 침체에서 찾고 있지만,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 초기의 고환율 용인 정책도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로서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고환율 정책 결과 파생된 고유가와 고물가에 크게 덴 뒤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환율 인하에 나섰지만 수백억달러로 추산되는 달러만 날리는 결과를 낳았다. 다시 순채무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생겼다.

인플레를 진정시키기 위한 금리 인상 카드도 여의치 않다. 640조원을 넘어선 가계 부채 때문에 자칫 금융 대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촉발된 글로벌 경기침체는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고유가·고물가·고환율의 새 3고(高)시대에 정부의 현명한 정책 판단과 가계 소비자들의 지혜로운 소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인플레이션 & 이야기

인플레이션이란 화폐 가치가 하락하여 물가가 전반적·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제 현상을 지칭한다. '바람을 넣다, 부풀게 하다(inflate)'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옛날에 소를 팔러 가는 상인들이 소금에 절인 마른 풀을 소에게 먹인 뒤 물을 많이 마시게 해 소가 실제보다 더 살찌게 보임으로써 소를 비싸게 팔아먹는 것을 뜻했다.

화폐가치 감소 현상이 지속되면 가계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이것이 내수시장의 침체를 불러오면서 경기가 침체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장기간 계속되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이 올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플레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다. 적정한 인플레는 투자를 촉진해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인플레가 통제를 벗어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역사를 살펴 보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초(超)인플레가 빈번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10년 동안 물가가 무려 1조4천억배나 상승했다. 세금과 채권으로 충분한 세입을 확보하지 못한 정부가 제국은행을 통해 화폐를 무분별하게 찍어낸 재앙이었다.

정부의 부채를 갚기 위한 수단으로 인플레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 당시 섭정을 했던 오를레앙 공은 지폐를 마구 찍어 인플레를 유발시켰다. 화폐 가치가 엄청나게 하락하면서 정부가 국민들에게 진 빚(국채)도 줄어들었다. 당시 은행에 돈을 맡겼다가 돈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경험한 프랑스 국민들은 이후 은행(Bank)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게 됐다. 소시에떼 제네널, 크레딧 스위스, BNP 파리바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은행 이름에 Bank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술가 맥스 샤피로는 저서 '인플레로 돈버는 사람들'에서 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멸망이 초인플레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선 역사상 많은 최고 권력자들이 거대한 빚을 갚는데 가장 쉬운 방법으로 통화를 마구 찍어낸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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