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도 서비스 8천개→91개로 통합 광역화
논란을 빚었던 '상하수도 서비스 개선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법률' 제정이 결국 백지화될 전망이다. 이만의 환경부 장관은 지난 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물산업지원법으로도 알려진 이 법안을 더 이상 입법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환영 성명을 내고 먹는 물의 공공성 강화에 전력을 다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상수도 민간위탁과 함께 이 법의 주요 골자 중 하나인 수돗물 관리 광역화는 앞으로 계속 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전국 164개 자치단체별로 각각 상수도를 운영하는 현행 체제로는 만성적자→시설투자 부족→생산원가 상승→요금인상 압박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환경부가 광역화의 모델로 꼽기도 한 이탈리아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풍부한 수자원, 빈약한 물 관리
이탈리아 북부 최대 도시, 밀라노(Milano)는 이탈리아의 경제적 수도라 할 정도로 경제 중심지이다. 대구시민들에게는 섬유패션산업 육성을 기치로 내걸었던 대구시의 '밀라노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친숙한 '패션의 메카'이다.
이곳의 상수도시설은 한국이나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다른 모습이다. 인근에 큰 강이 없어 취수장 대신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쓴다. 400여개의 관정에서 뽑아낸 물은 밀라노시와 인근 지역 주민 180만명에게 공급된다. 아르미(Armi) 가압장에서 만난 안드레아 판투찌(Fantuzzi) 시설부장은 "이탈리아 상수원 가운데 하천·호수 등의 지표수는 고작 13% 정도고 지역별 물 사정도 큰 차이가 있다"라며 "남부의 경우 물 부족이 심해 광역상수도공사 설립이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또 유럽에서 전기값은 가장 비싸고 물값은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 1987년 국민투표를 통해 원자력발전 포기를 결정한 뒤 전기를 일부 수입하면서 전기요금은 EU 평균치보다 30~40% 높다. 반면 수도요금은 인근 프랑스나 영국의 3분의 1(본지 8월 22일자 10면 참조)에도 못 미친다. 요금 현실화를 미뤄온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상수도 보급률이 96%에 이르는 이탈리아는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이 278ℓ나 돼 유럽에서 가장 물 소비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밀라노의 경우에는 약 500ℓ나 된다. 반면 상수도관에서 새어나가는 물의 비율(누수율)이 27%가 될 만큼 취약하다. 이에 따라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유럽연합의 법적 기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상하수도분야 투자규모는 360억유로에 달한다.
◆지속적인 개혁 추진
이처럼 이탈리아는 물 관리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뒤처진 편이지만 지속적인 개혁이 이뤄지고 있어 최근 주목받고 있다. 핵심은 1994년 제정한 수도산업구조개편법(The Galli Law)이다. 8천개가 넘는 지자체가 각각 담당해오던 상하수도 서비스가 '최적지역범위'(ATO) 91개로 통합됐다. 경제성 확보를 위해 광역화된 행정구역을 새로 만든 셈이다. ATO 내 서비스 공급형태와 운영회사 감독은 자체 규제기구(AATO)가 담당한다.
ATO의 상하수도 서비스 관리는 공개입찰을 통해 지정된 사업자가 장기계약(20~30년)을 통해 담당하도록 돼 있다. 소유와 운영을 분리한 것이다. 사업자의 형태는 민관합작기업이나 지방정부 소유의 공기업으로 나뉜다. 또 1개 ATO 내에서는 단일 운영회사가 상하수도사업을 모두 맡는 '통합 물 서비스'(SII)를 채택하고 있다.
특히 주요 도시를 근거로 성장한 물 전문기업들은 다른 지역의 사업에까지 참여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로마를 기반으로 하는 ACEA. 1909년 설립된 ACEA는 1999년 기업을 공개, 지분 49%가 주식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나머지 지분은 로마시가 갖고 있다. 1937년 수돗물 공급사업을 시작한 이후 사업범위를 넓혀 현재 세계 11위 물 기업에 올라 있다. 전 세계 서비스인구는 1천560만명에 이르며 해외사업 비중은 40% 정도다.
2003년부터 밀라노시 ATO의 서비스를 맡고 있는 밀라노지방공사, MM(Metropolitana Milanese spa)의 란프란코 센(Senn) 사장은 "MM의 경우 ACEA와 달리 지자체 공공기업인 까닭에 다른 지역에 참여할 수 없어 성장에 한계가 있다"며 "앞으로 세계 진출을 위해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역화는 성공
'갈리 법' 개혁으로 이탈리아는 물 산업에서 가장 비중이 큰 상하수도 광역화에는 성공했으나 본격적인 시장 형성과 전문기업 육성은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까다로운 위탁 관련 규제로 지자체들이 외면한 탓이다. 유예기간을 두고 있지만 공개입찰로 민간위탁이 이뤄진 곳은 91개 ATO 가운데 30%가 채 안 된다. ATO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기존 지방공사에 위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물 산업분야의 민간 참여를 촉진하는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법안 초안은 상하수도 서비스 계약은 민간회사 또는 민간지분이 30% 이상인 민관협력회사와 맺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지역 여건에 따라 공공기업이 민간회사보다 더 효율적일 때만 예외적으로 지자체 '지역 내부 계약'을 인정하는 등 민간부문의 시장 참여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안이 제대로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측된다. 기술·재정·정치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당초 방침이 완화될 예정이라는 것. '지역 내부 계약'의 급격한 제한이 일부 물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고 공개 입찰보다 내부계약이 더 보편화돼 있는 지자체들의 반발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ATO들의 대표기구인 ANEA의 루치아노 바지아니 사장은 "최근 수년간 쌓은 경험을 통해 장단점이 파악된 만큼 ATO들이 운영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라며 "사실상 직접적 경쟁이 없는 물 시장에서는 적절한 규제만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 밀라노 프로빈치아 ATO 에노스 보리니 사무국장
"법적 강제성을 바탕으로 한 이탈리아의 물 산업 구조개편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또 운영방식에 있어서는 프랑스나 영국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방식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탈리아 91개 ATO 가운데 하나인 밀라노 프로빈치아(Provincia·우리의 도에 해당) ATO의 에노스 보리니(Borrini) 사무국장은 상하수도 서비스 개편에서 어떤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가 라는 질문에 "중요한 것은 각 나라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도 1994년 '갈리법' 시행 이후 많은 개선을 이뤘지만 10여년이 지나면서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는 것.
"정부는 사업의 운영형태와 관련해 지방정부에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수도사업 구조개편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개혁은 아직도 진행 중인 실정입니다."
요금 인상에 대해서 그는 "갈리 법 시행 이후 점진적 요금 현실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2010년쯤에는 이탈리아 상하수도 요금 총액이 50억유로를 넘어설 전망"이라고 말했다. 밀라노지역도 상수도요금이 현재 ㎥ 당 0.55유로에서 1유로 정도까지 인상이 예상된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개 ATO에 1개 회사만 정하게 돼 있고 계약기간도 수십 년에 이르러 경쟁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상하수도 광역화와 민간위탁을 추진한다면 경쟁체제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롬바르디아주에 속해 있는 11개 프로빈치아 가운데 하나인 밀라노 프로빈스는 밀라노시 등 189개 기초자치단체(코뮌)로 구성돼 있다. 약 2천㎢의 면적에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6.5%인 430만명이 거주, 유럽에서도 가장 인구가 밀집해 있는 편이다.
이상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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