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불멸의 15인 시공초월 맞장 인터뷰

입력 2008-09-03 06:00:00

사드·카사노바·연산군…그 오해와 진실

각 분야의 전문가 15인이 역사 속 인물 15인을 '가상 인터뷰'했다. 전문가들의 '가상 인터뷰'인 만큼 내용은 지은이들의 오랜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필자들은 '역사 속 인물들과 우리 사이에 만들어진 오해를 해명하고,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귀족들의 성적학대는 흔한 일"

사디즘과 사디스트의 유래가 된 사드 후작. 그는 프랑스 혁명을 겪은 몰락한 귀족이며 가학변태의 원조다. 인생의 3분의 1을 옥중에서 보냈으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옥중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변태성욕을 묘사한 것으로 치부돼 오랫동안 금서로 묻혀 있었다.

변태 성욕자 사드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쾌락이 뭔지나 아는가?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내가 욕망하는 것을 만족시키는 일, 나는 거기에 충실할 뿐이다. 뒷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만 즐거우면 됐지. 나 때문에 누가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지?'

그는 자신이 음흉하고 요상한 변태성욕자의 대명사로 몰리는 것을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이 15세 시절 귀족이 여자에게 가하는 성적학대는 가벼운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파리 사창가에서 그 같은 성적학대와 채찍질은 아주 흔했으며 자신의 행위가 범죄로 여겨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파리 귀족들은 창녀를 하룻밤 산 다음 밤새 학대했고, 새벽이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창녀들을 포주들이 데려갔다는 것이다. 수많은 귀족들이 다 그랬는데, 자신은 재수가 없고, 솔직하게 드러냈기에 문제가 됐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좀 솔직했고 운이 나빴기에 유명인사가 된 셈이다.

◆신부 서품까지 받은 카사노바

희대의 바람둥이, 호색한의 대명사 카사노바. 그는 수많은 여인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주의자이며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당시 유럽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던 파도바 대학에서 18세에 종교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믿기 어렵지만 서품을 받은 신부이며 40권이 넘는 책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다.

18세기가 낳은 전설적인 로맨티스트이자 쾌락주의자였던 카사노바. 그는 난잡한 생활, 무절제한 생활을 일삼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내 위의 7할 이상을 채우지 않았다. 잠을 충분히 잤고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다.'

카사노바는 평생 수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지만 성병에 걸리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 비결을 신선한 음식과 충분한 휴식에 있다고 말한다. 카사노바의 고향 베네치아는 맑은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어 늘 싱싱한 해산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정력을 유지하기 위해 석화(굴)와 숭어알, 달걀 흰자위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또 성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숭어 알집을 '보호막'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40여년 동안 100여명의 여인들과 로맨스를 즐겼다. 추문이 많았고 그에 따른 결투도 많아 도망자 생활도 했다.

◆왕권 강화 실패하자 '폭군'으로 규정

황음무도한 폭군 연산군. 역사 속에서 그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규정돼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를 자세히 보면 다르다. 그는 왕권과 신권이 부딪치며 뿜어내는 불꽃 속에서 희생됐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연산군은 여느 왕들보다 제왕적 풍류를 즐겼다. '연산군 일기'에는 그가 지은 시 130여편이 있는데, 조선조 도학자들은 이를 비루하게 여겼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애초부터 폭군으로 찍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연산군의 부왕인 성종도 풍류를 즐겼지만 그는 성군이 되고 연산군은 쫓겨난 것은 왕권과 신권의 격돌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무오사화에 대해 지은이는 연산군을 이렇게 변명한다.

'연산군의 부왕인 성종이 극단적인 문치로 흐른 까닭에 신권이 전례 없이 비대해 있었다. 급기야 사관 김일손이 에 조부인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김종직의 시를 실으려고 했다. 이를 방치할 경우 신하들 손에 군왕이 완전히 제어되는 상황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 역시 사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연산군 생모의 사사를 강력히 주장했던 윤필상과 같은 인물이 연산군이 생모를 추숭할 때 앞장섰다. 그 가증스러움에 연산군은 책임을 물은 것이며, 자식 된 도리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사당한 어머니를 추숭하는 것은 당연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왕권강화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이었다는 점에서도 다르게 해석한다. 어떤 왕이나 왕권을 강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과 성종은 태종과 세조가 이미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놓은 상태에서 보위에 올랐기에 '베풀기'만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다만 힘이 없는 상태에서 왕권강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철저히 '폭군'으로 규정됐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혁명가

젊은이들의 우상 체 게바라. 젊은이들은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즐겨 입고 대형 서점에는 체 게바라 기획코너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군인 집안 자녀였다. 말하자면 체 게바라는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다. 의과대학을 다녔고 평범한 의사로 살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 내부의 두려움과 비겁함을 이기기 위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갔고,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체 게바라가 조금만 비겁해지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소시민의 생활수칙'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불의에 분통을 터뜨리는 평범한 자연인이었고,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는 대신 맞서 싸운 사람이었다.

체 게바라는 어릴 때부터 평생 천식을 앓았다. 천식은 그 안에 존재하는 적이었다. 그는 천식에 지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책을 보았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축구 럭비 수영 스키 농구 핸드볼…. 한때 체 게바라는 축구와 럭비선수이기도 했다. 체 게바라는 천식에 대항하듯 제국주의에 대항했다. 천식을 앓았기에 그는 체력을 길렀고, 압제가 있었기에 투사가 됐다. '적'이 있는 장소에서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적이 없었더라면 그의 존재 역시 희미했을지도 모른다.

이 인물들 외에도 책은 광개토대왕, 덩샤오핑, 박지원, 황진이, 히치콕, 이소룡, 안톤 체호프, 가롯 유다, 흥선대원군, 김옥균, 이승만 등에 대한 '가상 인터뷰'를 싣고 있다.

252쪽, 1만1천9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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