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상상력이 먹여 살린다. 괴짜, 몽상가, 현실부적응자라며 손가락질 받던 이들은 모험심과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에게 없어서 안 될 인재로 자리매김했다. 세계적 기업의 대표들은 최고경영자(CEO)라는 말 대신 최고상상력책임자(CIO : Chief Imagination Officer)로 불리기를 바란다. '우뇌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감성과 직관을 자극하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서점에는 상상력의 힘을 강조하는 책들로 가득 찬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여전히 잘 외우고 빨리 계산하는 능력이 평가의 잣대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라는 광고 카피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단단한 틀 속에 갇혀 있다. 학력 평가 대신 '기발하고 괴짜스런 생각 겨루기' 대회는 왜 만들지 못할까?
◆대구미래상상연구소를 만들자
선입견을 버리고 나면 세상은 전혀 다른 현실로 펼쳐진다. 최근 대구의 전문가 그룹이 가칭 '대구미래상상연구소'를 만들겠다고 나서 관심을 모았다. 제도권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초등학생부터 주부, 직장인 등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모아보자는 취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 또는 원목' 같은 생각들을 한데 모으고, 모으는 방법조차도 제한을 두지 말자는 것이 설립 이유다. 아울러 괴짜나 기인처럼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는 또는 안티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찾아가 자문하는 것도 연구소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관련 예산이 확보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언론에 보도된 지 한달이 지나도록 진척은 없는 상태다. 올해 쓸 수 있는 예산은 1억원. 하지만 사용상 문제와 내부적 논란을 거치면서 자칫 연구소 설립 자체가 흐지부지하게 될 우려마저 낳고 있다. 예산이 대구시 보조금이기 때문에 시민이 낸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하면 선거법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는 걱정도 나왔다. 연구소 설립을 준비 중인 한 관계자는 "생각의 틀을 깨보자는 것이 연구소의 목적인데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직 생각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일단 참여자들이 기본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구소가 설립되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말했다.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다르다
"말랑말랑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두뇌를 얼마나 빨리 딱딱하게 만드는가 경쟁하는 사회입니다." 한 중학교 교사의 푸념이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은 우뇌적 사고를 위한 교육을 받는다. 양손에 물감을 찍어 온 벽에 마구잡이로 찍어바르고, 그림 속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내며, 누가 더 이상한 모양의 공룡을 만드는지 경쟁한다. 하지만 제도권 교육에 편입되면 우뇌적 사고는 훼방꾼에 불과하다. 주어진 틀 속에서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답을 얻어내느냐가 중요할 뿐 상상력은 엉뚱한 생각으로 치부되고, 공상은 정신나간 헛짓으로 비난받는다. 강용희 경북대 과학영재교육원장은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얼마나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가 영재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물'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봄이 온다'고 답하는 것이 입체적이고 창의적 사고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집중력과 상상력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다르다. 부모들은 상상력을 자극하겠다며 아이들이 더 많은 프로그램을 접하게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적 아이쇼핑'을 할 뿐이다. 더플로우 창의놀이학교 이현숙 원장은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무언가에 오래 집중할 때 짜릿함을 느끼며, 그것이 상상력의 토대가 된다"며 "창의력이 부족한 아이는 결코 반복학습이나 놀이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는 어른들도 금세 이해할 수 있는 블럭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린다. 교사나 부모의 눈치를 보며 가식적이고 정형화된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창의적인 아이는 얼핏 봐서 조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면 깜짝 놀랄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임을 알게 된다.
◆생각의 틀을 바꿔라
인류 역사에서 우뇌는 좌뇌보다 열등했다. 언어와 논리를 담당하는 좌뇌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뇌라고 여겼고, 우뇌는 동물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뇌의 감성적, 미학적, 창의적 기능이 밝혀지면서 세상도 바뀌었다.
무조건 외우고 계산하는 시험방식도 바뀌고 있다. 예일대 심리학과 로버트 스텐버그 교수는 '레인보 프로젝트'를 고안했다. 미국식 수능시험인 SAT 대신 5칸짜리 만화를 제시하고 빈 말풍선에 재미있는 말을 집어넣거나 제목만 듣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대학 입학 이후 학업성적 예측에서 레인보 프로젝트는 SAT보다 2배나 더 성공적이었다. 세계 최고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인 빌 게이츠는 일년에 두번 정도 세상과 동떨어져 은둔에 들어간다. 유명한 '생각 주간'(Think Week)이다. 캘리포니아 외딴 호숫가에 있는 소박한 별장에서 직원은 물론 가족 방문도 거절한 채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지난 1995년 그가 발표한 보고서 '인터넷의 조류'도 생각 주간을 통해 태어났다. 당시 이 보고서는 당시 인터넷 브라우저 시장에서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넷스케이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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