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구지하철 반월당역 메트로센터에 갔다가,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했습니다. 유지·보수 비용 부담을 둘러싸고 대구시와 갈등을 빚던 상인들이 이날부로 운행을 중단한 것입니다. 세월의 모진 풍파 속에 자녀를 키우느라 관절이 낡고 해진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게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는 심연처럼 깊어보입니다. 그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던 할아버지·할머니들의 눈빛이 선합니다. 구매력이 없는 노인들은 지하철을 운행하는 대구시 지하철공사에도, 상가 상인들에게도 도움 안 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요. 같은 시각, 반월당역과 메트로센터 식당가의 에스컬레이터들은 씽씽 잘도 돌아가더군요. 생각하기에 따라 별일 아닐 수 있는 작은 풍경이 때로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오랜만에 간첩 사건이 터졌습니다. 탈북자로 위장한 30대 여성이 군부대 장교들에게 접근해 군사기밀을 빼돌린 뒤 북에 넘겼다고 합니다. 현역 장교들이 줄줄이 연루된 것도 놀랍고, 그녀가 기밀을 빼낸 수법이 마타하리 사건을 연상케 해 이래저래 세상의 이목을 끕니다.
그런데 한 신문은 지난 28일자 1면 기사에 '30대 미모 여간첩 장교 4명 성포섭'이라는 제목을 뽑았더군요.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본 그 여간첩이 미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편집은 의도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는 말이 있지요.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도 미인이 아니었다면, 운명이 달라졌을 겁니다. 평소 논조를 통해 유추하건대 이 신문은 여간첩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그리 편집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예쁘고 잘생긴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젖먹이들조차 예쁘고 잘생긴 이성에게 호감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컴퓨터로 분석해 평균치 이미지를 만들었더니 미남·미녀상이 나오더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미남·미녀 밝힘증이 있는 것은 외모가 뛰어난 이성일수록 좋은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끔 진화적 선택을 해왔기 때문인 듯합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 프리네(Phyrine)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이었습니다. 그 미모는 수많은 권세가와 사상가들의 애간장을 녹였고,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그녀와의 염문에 휘말렸습니다. 프리네의 행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에우티아스라는 사람이 어느 날 그녀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합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그녀에게는 사형선고가 예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배심원들은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변호를 맡은 프리네의 옛 애인 히페레이데스가 법정에서 던진 승부수가 먹혀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시한 변론의 근거는 미학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그는 그녀의 알몸을 덮고 있던 천을 제막식하듯 벗겨냅니다. "신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몸을 처벌할 수 있는가?" 배심원들은 경탄합니다. '오!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법이나 기준은 효력이 없다.'
모두들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인간의 잣대라는 게 갈대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에 불과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갈대'들은 약자에게 회초리보다 매섭고 엄한 파공음(破空音)을 내지만, 권력 앞에서는 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조용히 드러눕는 것 같습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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