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눈물/전송열 지음/글항아리 펴냄
만시(挽詩)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시다. '만시(輓詩)'로 쓰기도 하는데, 끈다는 뜻으로 상여를 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많은 한시를 지었다. 당시 사대부가에서 누가 죽으면 만시를 지어 애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에 속했다. 가깝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애절한 마음을 드러냈고, 좀 먼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의례적인 시를 짓기도 했다.
조선시대 만시에는 아내를 위한 도망시(悼亡詩), 친구를 위한 도붕시(悼朋詩), 먼저 간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가 있다. 스승과 제자, 선배 혹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위한 만시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린 자만시(自輓詩)를 짓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는 처지였는데, 아내가 죽었을 때 짓는 도망시만큼은 체면도 위엄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이 시는 추사 김정희가 아내의 죽음 소식을 유배지에서 듣고 지은 시로, 조선시대 도망시의 압권으로 꼽힌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아내가 병든 뒤에는 더욱 자주 편지를 보냈다. 약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아예 드러누웠다는데 그렇게 아픈 것인지 등 걱정이 많았다. 아내가 죽은 다음날에도 추사는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없었다. 한 달 뒤 아내의 죽음을 듣고 추사는 원통한 마음을 담아 도망시를 썼다고 한다.
조선 최후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이건창은 22세에 요절한 아내 서씨를 위해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라는 시를 썼다.
'술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다시 차마 중문으로 들어가 보지만/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 내 어찌 일찍 벼슬하기만을 바랐겠소만/ 이제야 조금 알아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박복한 당신 향수를 누리지도 못했는데/ 지금 문 앞에는 햅쌀 향기만 그득하구려/ 아이는 어려서 곡을 할 줄 몰라서/ 곡성이 글 읽는 소리와도 같다가/ 갑자기 엉엉 울며 멈추지 않더니/ 하염없는 눈물만 구슬같이 흘렀소'
남의 슬픔을 대신해서 지은 대인작도 있다. 조선 중기 당시풍의 시로 명성을 날린 백광훈이 지은 만시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 심정을 대신 쓴 것인데, 마치 본인이 당한 일처럼 내용이 비감하다.
'그 옛날 집엔 고운 먼지만 가득하고/ 새 무덤은 얼었고 길은 멀기만 하오/ 백년해로 하자던 약속의 말만 남긴 채/ 수없이 흐르는 눈물에 부여서 보낼 뿐이오'
자신의 죽음을 기리는 자만시도 있다. 택당 이식은 자신이 죽기 20일 전에 병상에 누워 시를 받아 적게 했는데, 짧지만 한평생의 시름을 그 안에 모두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평생 시름 속을 지나다 보니/ 밝은 달은 봐도봐도 만족지 못했는데/ 이젠 길이길이 대할 것이매/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지는 않으리'
조선시대에는 질병으로 어린 자식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영조 때 중인 김상채는 홍역으로 아들을 잃고 이렇게 썼다.
'너는 내가 죽어도 곡하지 못할 텐데/ 내가 어찌 네가 간다고 통곡해야 하느냐/ 이 통곡은 또 무슨 통곡이란 말이냐/ 부자간 골육이 떨어져나가는 이 마당에/ 내 무릎에서 날마다 너를 어르며 놀았는데/ (중략) 너의 어미 심한 병이 갈수록 더해져/ 수개월을 사곡에서 살았을 때/ 어린 마음에도 애타하며 울면서/ 삼복더위 지나도록 오고갔었지/ 네 어미가 조금 나아 집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너에게 홍역이 생기고 말았네/ 하늘의 이치는 어찌 이처럼 혹독하단 말인가/ 참담히도 이 아이를 길러보지도 못한 채 꺾어버리다니/ 통곡이 맺히어 애간장이 찢어질 듯하구나/ 의술과 점술로도 제대로 다스려보지 못했으니/ 너는 단 한 번만이라도 알아야만 하리라/ 내 오장이 지금 찢어질 것만 같음을/ 살아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요/ 죽은 뒤라야 네 얼굴 볼 수 있겠지/ 이제 어떻게 너의 죽음을 위로해야 하나/ 슬픔만 만 가지로 쏟아질 뿐인데/ 쓸쓸하구나, 일곱 살 아이/ 저 산 한 귀퉁이에 묻어야만 하다니'
다음해 죽은 아들의 생일을 맞아 지독한 그리움에 사무친 김상채는 눈물 젖은 시를 썼다.
'지난해 바로 오늘 널 데리고 놀았는데/ 올해 그 오늘은 아득히 흔적조차 없구나/ 마음 깊이 맺힌 이 아픔 어느 때나 끝날까/ 마당에 네 자취는 볼 때마다 눈물이 나니'
친구의 죽음과 사회를 한탄하는 시도 있다.
권필은 광해군 왕비 유씨 집안의 득세를 시로 풍자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길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권필이 죽을 때 창밖에는 복사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권필의 죽음을 들은 친구 이안눌은 시구 하나 때문에 죽어 사라진 시인의 운명을 귀를 씻고 눈을 감으며 저주했다.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게 귀가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저 수많은 산 비바람 몰아칠 때에/ 천재 시인 죽었단 얘기 내 귀에 들리다니'
세월이 흘러 1624년, 이안눌은 54세의 나이에 이괄의 난에 연루돼 하옥됐다가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를 갔다. 이때가 3월 28일이었는데 마침 친구 권필이 죽은 동대문 밖 주막 앞을 지나게 됐다. 이안눌은 죽은 친구와 자신의 처지가 똑같이 된 것을 생각하며 다시 한편의 시를 지었다.
'미천한 신의 죄 커서 죽어도 외려 마땅한데/ 저 먼 곳 유배 가며 좋은 시절 생각해보네/ 복사꽃 흩날리는 동쪽 성문을 지나가자니/ 진짜 시인 내 친구 생각에 지금도 슬프구나'
조선시대 만시는 인생의 곡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문학이기도 했다. 책에는 35편의 만시와 해설이 실려 있다. 조선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고, 조선 한문학의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은 만시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대중적으로 해설한 최초의 책이다. 400쪽, 1만4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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