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의 필름통] 자연다큐 '지구' 추천합니다

입력 2008-08-23 06:00:00

코끼리 모녀가 길을 걷고 있다.

시커먼 땅을 쿵쿵 내리찍으며 더운 입김을 힘겹게 내뿜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변에 물은 고사하고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다. 하얀 먼지를 등에 이고 먼지를 풀썩풀썩 밟는 모습이 무척 피로해 보인다. 며칠을 굶었는지 통통하던 뱃살이 홀쭉하다. 나란히 걷고 있지만, 엄마의 보폭을 따라잡기 위해 딸은 안간힘을 쓴다.

등의 주름과 앙상히 솟아오른 척추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모녀를 근접 촬영하던 카메라가 서서히 공중으로 빠져나간다. 차츰 모녀의 모습도 작아진다. 그러나 쉴 나무도 보이지 않고, 멀리 산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모녀는 쌀알만큼 작아진다. 그래도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맙소사! 사막이다. 둘이 가야 할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내레이션이 들린다. "둘은 물을 찾지 못했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앞이 흐려진다.

영국 BBC가 제작한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의 한 장면이다. 맙소사! 자연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울다니.

'동물의 왕국'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 인간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사이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물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본다. 생명을 낳고, 거두고, 혹독한 자연 앞에 그 생명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동물들, 그리고 죽은 피붙이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냉혹한 현실들이 인간사와 다름없는 것이다.

자연 속에 한없이 나약한 동물처럼, 정글 같은 도심에 살며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세상, 그곳이 바로 '동물의 왕국'인 것이다.

시인 엄원태는 한때 '동물의 왕국'의 팬이었다. '…/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 집요한 추궁,/ 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 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 가차없는 집중력이 숨어 있다/…'('갯우렁') 갯우렁이 백합조개를 잡아먹을 때 껍질에 빨판으로 달라붙어, 마치 꼭 껴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드릴로 구멍을 뚫는 그 집요함에서 가차 없는 인간사가 그려진다.

한 편의 자연다큐멘터리가 9월 4일 극장에 내걸린다. BBC와 독일 그린라이트 미디어가 공동 제작했으며 40여명의 카메라맨들이 세계 26개국 200여 곳에서 촬영한 '지구'이다. '살아있는 지구'의 극장판이다.

독일에서는 박스오피스에서 3주 동안 1위에 올랐었고 프랑스에서는 10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 일본에서도 올해 초 개봉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이례적으로 160여 개 스크린에 걸린다.

그동안의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고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돌고래가 거대한 파도에서 서핑하는 모습을 같이 따라가고, 동물들의 사냥 모습을 고공에서 촬영하는 등 역동적인 카메라웍을 보여준다. 동물들의 드라마틱한 생태에 카메라 연출적인 기법이 동원된 것이다.

올해 서울환경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한 이 영화는 톱스타 장동건이 내레이터로, 감독 이명세가 내레이션 감독으로 각각 참여했다.

46억년 지구가 선사하는 생명 어드벤처, 선선해지는 가을 꼭 추천하고픈 영화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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