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사랑하는 당신께/아가씨 혹은 저

입력 2008-08-20 06:00:40

"이놈 정말 좋은 놈이에요."

당신 친구 분인 우리 대리점 사장님과 당신의 또 한 친구 분-당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말했습니다.-이 모여서 갈비를 먹었습니다. 그때 우리 대리점 사장님이 저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한 친구 분도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며칠 후인가 당신이 제게 여행을 제의하셨을 때 제가 당신을 따라 나선 것은 아마도 그 말 때문이었을 겁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남자……. 나는 사람들이 어떤 여자를 가리킬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제의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남자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당신하고 어릴 때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이 한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대천 바닷가에 엷은 주황색 노을이 깔릴 때, 그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당신은 지금 별거중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이고, 그리고 괴롭다고요. 당신 아내의 의심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남자인 당신을 당신의 아내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고요. 직장을 여러 번 옮긴 것도 그 아내 때문이었다고요.

도망가고 싶은 의무감과 당신 쪽으로 끌려가고 싶은, 팽팽히 이어진 내 마음의 망설임이, 그 팽팽한 현이 제 가슴 속에서 툭, 끊어져버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지요.

"전 당신에게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

당신은 저를 자주 찾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속옷을 빨아드리고 머리도 잘라 드렸습니다. 머리를 자르려고 목욕탕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당신의 모습은 천진한 소년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이 사람을 악마 같은 부인으로부터 구해드리자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뛰어들겠다고요. 아아, 정말이지 내 몸 하나 부서져서 당신을 구할 수 있다면…하고 생각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경고했지요. "세 번이나 이러시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울먹이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내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당신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난 후 의심증이 생겼기 때문에 당신은 아이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전 부인하고의 상처가 너무 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의 집에 발길이 뜸하시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낡은 감색 우산을 쓰고 계셨습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눈빛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저는 눈길조차 돌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그 분의 동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아가씨도 돈을 떼였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드렸어요"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분의 말이 제 입을 막았습니다.

"정신차려요. 그 인간은 악마야."

어떻게 당신의 오랜 친구가 하는 말과 오래전부터 당신의 아내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제 일생을 걸었는데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당신이 악마라고 하다니요……. 저는 그 길로 뛰쳐나가서 당신의 회사 앞으로 갔습니다. 퇴근하는 당신은 낯선 여자와 함께 계시더군요. 밤 열 두시 반 종로 3가. 알전구가 늘어진 그 많은 포장마차의 대열 속에 당신들 둘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작가 공지영의 소설집 '인간의 대한 예의'에 함께 묶인 단편 '사랑하는 당신께'를 요약했다. 남자가 남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성에게도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여성은 그 차이를 알지 못했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고 말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주관적이다. 파렴치한 범죄자들끼리도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참 좋은 놈인데, 너무 안됐어…'라고 말한다. 아무리 흉악하고 치사한 인간들일지라도 함께 어울리는 사이라면 서로는 '좋은 친구'가 분명하다. 그래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끼리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통용될 만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도둑'과 '경찰'은 각자 '좋은 친구'가 있겠지만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이 소설도 그렇고, 많은 TV 드라마도 그렇지만 남녀간의 '불륜 스토리'에서는 대부분 '남자=나쁜 놈, 여자=희생양'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여성이 약자라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남자가 없을 때 그녀들은 냉장고도 번쩍 들 수 있다.)

어쨌든 창녀촌 한두 번 들락거린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의 문제다. TV 드라마에서 흔히 남자가 '나쁜 놈'으로 보이는 것은 드라마의 무대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남자의 집'이기 때문이다. 무대를 상대 여성의 집으로 바꾸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여성 쪽을 비추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미혼이거나 이혼녀인 경우이어서 '죄질'이 덜 나쁘거나 때때로 지고지순해 보인다.)

이혼녀에 대한 따가운 시선 역시 이혼한 여성만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남자 배우도 있는데…. 이혼과 불륜은 단독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불륜'과 '이혼'은 빨래터에서 속닥거리는 '흥미로운 이야기'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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