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입력 2008-08-16 06:00:28

"난 저 사람 몰라. 날 쫓아와 겁탈하려 했어. 그는 미쳤어. 나는 그 사람 이름도 모르는 걸. 그가 누군지 몰라. 그가 누군지 몰라… ."

남자는 자궁 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채 베란다에서 죽어가고, 권총을 든 여자는 '그를 모른다'고만 혼잣말로 되풀이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낭만적이고 비장미 넘치는 제목의 이 영화는 오랫동안 음란하고 불온한 영화로 낙인 찍혔다. 1972년 12월 15일 파리에서 최초로 공개됐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상영금지됐다 1987년 해금됐고, 한국에서는 24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극장을 잡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명배우 말론 브랜도가 알몸으로 연기했고, 당시 20세의 마리아 슈나이더도 체모를 드러내는 노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디스트적인 섹스, 동물적인 육욕 등 36년 전이란 시간대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영화였다. 한국에서 '서울 탱고' 등 명성(?)에 편승한 에로물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에로티시즘은 생존의 문제에선 약간 빗겨나 있다. 걱정 근심 없을 때, 약간은 감정적 사치에 의한 욕망 해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섹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고독을 얘기하고, 그 수단으로 섹스를 끄집어내고 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한 중년남. 그의 아내는 자살했다. 욕실 바닥과 벽을 피로 적시며 죽어갔다. 이 남자가 아는 것은 아내가 위층에 세 들어 사는 마르셀이란 남자에게 자신과 똑같은 파자마, 똑같은 술, 똑같은 육체를 제공하며 살았다는 것뿐이다.

그는 파리를 방황하다 빈 아파트에서 젊은 여인을 만난다.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둘은 정사를 나눈다. 상처받은 야수의 화급한 섹스.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진다.

이름 없는 남녀. 둘은 섹스로 얘기한다. 사랑도 삶도, 고통도 존재도 섹스 속에서만 이뤄진다. 그러나 곧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단계가 온다. 여자가 묻자 그는 "여기선 이름이 없어.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라며 부정한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들어보겠어?"라고 묻고는 '우우~' 동물의 소리를 낸다. 여자도 따라 동물 흉내를 낸다.

폴은 고통스럽다. 태어난 것도, 살아간다는 것도 견디기 어렵다. 인간이란 존재를 부정하고 되돌리고 싶다. 그때 그에게 잡힌 끈이 잔느다. 정확히 말하면 잔느의 몸이고, 잔느와의 동물적인 섹스다. 그 움직임은 하나의 의식이다. 마치 절도와 관능 속에서 춤추는 욕망의 탱고와 같은 것이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시인 박미영은 고독과 절망, 육욕으로 춤추는 폴의 의식을 동적인 탱고의 스텝으로 그리고 있다. 나쁜 추억을 외투처럼 걸친 한 남자가 비대해진 도시의 환락 속에서 춤추다, 낡은 세탁선 난간 아래에 껌을 붙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통째로 시 한 편에 담고 있다.

화가 이영철은 도시 한 모퉁이에서 소리 없이 가라앉은 폴을 '익명의 섬'으로 그려냈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영국 신구상회화의 대표작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폴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비스듬히 누운 한 남자, 그의 얼굴은 눈빛도 알 수 없도록 일그러져 있다. 소외와 고독으로 일그러진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영철은 잔느의 상반신 누드를 전면에 배치했다. 스무살, 갓 피어난 봉긋한 누드 위에 그녀가 세상을 향해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전신 누드를 드로잉으로 올려놓았다. 하단부는 붉은 색과 노란색으로, 상단부는 검은 색으로 채워 삶과 욕망의 실체와 죽음과 절대고독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배치했다.

창가에 선 폴의 뒷모습이 외로움과 처연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겨우 잡은 끈, 그 속에 피어나는 삶의 욕구와 사랑의 신호로 그는 "당신 이름을 알고 싶어"라고 말한다. 이 순간 터지는 총성. 그는 마지막 숨을 환한 파리의 파란 하늘을 향해 뿜어내고는 고통스런 파리에서의 마지막 춤을 마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수 '꽃')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1972)

감독: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말론 브랜도, 마리아 슈나이더

러닝타임:136분

줄거리:세느강 위를 달리는 열차 교각 아래 한 중년의 남자 폴(말론 브랜도)이 귀를 막고 고함을 지른다. 이때 그를 스쳐 지나는 젊은 여인 잔느(마리아 슈나이더). 그들은 임대 아파트에서 다시 만난다. 집과 가구를 둘러보는 잔느를 벽에 몰아붙인 채 키스를 퍼붓는 폴. 잔느도 열렬히 응하고 둘은 이름도 모른 채 짐승들처럼 격렬하게 정사를 나눈다. 섹스가 끝난 뒤 둘은 인사도 없이 서로 모르는 남남으로 거리를 나선다. 잔느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사랑에 빠진 얼굴로 약혼자에게 안기고 폴은 아내가 자살한 여관방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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