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만연한 '대통령 카니발리즘'

입력 2008-08-16 06:00:33

엄청난 권력에 따르는 엄청난 책임…한국 특유의 정치구조서 비롯

사례 1. 2006년 6월 새끼 곰이 고양이에 쫓겨 나무 위로 도망간 사진 기사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이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곰이 나무 위로 도망갈 때까지 노무현은 뭘 하고 있었나!'

사례 2. 시간이 흘러 지난달에 보도된 '악어 물어뜯는 표범 첫 촬영 화제'라는 사진 기사. 한 네티즌은 댓글로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는 촌평을 적었다.

모두가 서로 '네 탓'을 하고 있다. 쇠고기 정국 이후 정부는 '촛불집회 탓' 'PD수첩 탓'을 해대고 있고 '전임 노무현 정부 탓'도 한다. 야당에선 모두 '이명박 정부 탓'을 한다. 장사가 안 되면 '나라 탓'이고 '경기 탓'이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내 눈의 대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탓한다'며 이를 제대로 짚어냈다. 위의 사례는 그 중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뭐든지 대통령 탓'을 보여주는 일부에 불과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두고도 전임 정권의 정책 설거지론을 제기하며 굳이 전 대통령 흠집을 낸다. 우리는 왜 대통령을 욕하는 것일까?

◆대통령은 욕먹을 만한 자리

하세헌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그 이유가 있다고 봤다. 민주화 이전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힘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목소리는 억눌려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국민들이 독재 시대에 억눌려 있던 자유를 추구하면서 각계의 주장이 분출됐다. 질서와 원칙보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게 자유라는 그릇된 생각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하 교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잘못된 민주화 의식이 국민과 정부 양쪽에 스며든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 대상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는 것은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하 교수는 "국가정책이 잘 되든 못 되든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 있는 것"이라며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 중에서도 대통령의 권력이 특히 강해 국민이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것은 도덕적 측면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를 일종의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일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방어기제가 투사됐다는 해석이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과 원장은 "모든 사람이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서니 죄책감도 안 생긴다. 이웃이 아닌 내 일상과 떨어진 상징성 있는 인물은 책임질 필요가 없어 욕하기도 쉽다"며 '집단 심리'가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염신규 민예총 정책기획팀장도 이를 '하나의 사회적 상징을 번제물(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신께 바친 제물) 삼아 현실을 망각해 버리도록 하는 집단심리'로 봤다. 또한 "한국 사회의 내재화된 민주적 감수성이 외형적 정치제도에 못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를 통해 '남 탓' 행태가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고 보았다. 외세, 일제, 강대국, 권력에 의해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오랜 역사를 겪은 탓에 어느덧 그 프레임과 패러다임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특히 "노무현 정권이 이런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에 젖은 나머지, 남의 탓만 하다가 자기교정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했다.

인터넷이란 매체는 대통령 탓을 쉽게 하는 토양이 됐다.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정치적인 불만 사항도 손쉽게 쏟아내게 된 것이다.

◆'대통령' 대체 어떤 자리기에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한때 '제왕적 권력'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세헌 교수는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많은 것이 변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국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행정부 주요 직위 5천여개의 임명권을 들 수 있다. 대통령학 권위자인 함성득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대통령은 헌법기관 공무원과 국가산하단체 공무원 등을 포함하면 총 2만4천여명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다.

하 교수는 "모든 권력의 핵심은 인사권에서 나온다"며 한국에선 이를 견제할 수단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6일 국회 인사청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임명을 강행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국회는 미국처럼 대통령의 인사권에 의회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의견만 제시하는 수준으로는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비단 행정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여당을 통해 국회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임명권도 있는 대통령은 공권력까지 장악하고 있다. 행정·입법·사법 등 권력 3부에 두루두루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에 비해서도 아주 큰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유별난 중앙집권제도 한몫

한국 대통령의 권력 집중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이나 유럽이 봉건제를 거치면서 지방분권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과는 비교된다. 나라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권력이 분산되기보다 중앙집권적 정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이후 1천년 이상 이런 상황에서 왕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영향이 아직도 남아서 대통령의 권한도 크고 그에 따른 국민의 기대치도 높다.

1945년 광복 후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유진오 박사가 기초한 제헌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염두에 두고 작성됐다. 그런데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이승만 박사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바라고 있었다. 이 박사가 정치적인 협박까지 하며 격렬히 반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제로 출범했다. 이런 까닭에 대통령이 국회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출되는 등 내각책임제 요소가 남았지만, 이 박사는 이후 발췌 개헌 헌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내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다.

현재에도 한국의 정부 형태에는 국무총리제를 비롯한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남아 있다. 이승만 정부는 현재 '왕조적 국부형'(이우태 21세기 대구발전포럼 이사장)이나 '제왕적 1인 체제'(함성득 교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대통령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돼 있었음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함 교수는 '우리나라 권력구조 변천사가 점차 분권형 민주체제로 발전했다'고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세헌 교수는 "대통령 중심제를 하는 동안 ▷지역주의 조장·강화 ▷자질 검증 불능 등 정치발전에 상당한 문제점이 발생했다"며 "의원내각제가 이런 문제점을 비교적 많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근 쟁점이 됐던 개헌 논의에 찬성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우리시대의 마음공부'라는 책을 펴낸 권도갑 원불교 교무는 당시 "스트레스의 원인을 타인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찾아 스스로 책임지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로 남을 향해 '네 탓이야'라고 외치기 전에 '내 탓인가' 하고 자성하는 물음을 해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한 오세정 서울대 교수의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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