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여행은 골목길이다

입력 2008-08-07 13:03:09

여행은 골목길이다

마라톤 회의에 지쳐가던 오후, 나는 문득 프랑스의 좁은 골목길을 떠올렸다. 오래돼 낡고 무거운 창문을 열면 제멋대로 뭉툭뭉툭 생긴 자갈길이, 오래된 돌집들이 드리운(그래서 마치 이끼 냄새가 날 것 같은) 그림자 속으로 비스듬이 휘어져 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할머니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덜컹거리며 끌고 지나가고, 짧은 머리에 날씬한 롱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도 지나간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그늘지고 서늘한 동굴 같은 골목길을 교향곡처럼 깊은 소리로 울리고 지나간다. 어두운 골목 덕분에 지붕들 사이 좁은 하늘이 선명하다.

나는 어느새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칠리아섬, 저 끝에 바다 한 자락이 걸려있는 골목길로 날아간다. 시칠리아섬의 집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바닷바람과 기분 좋은 햇살을 들이기 위해 커다란 베란다를 가지고 있다. 한겨울에도 함박눈이 내릴 만큼은 춥지 않으니 벽난로와 굴뚝 따위는 필요 없다. 그래서 시칠리아섬의 산타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굴뚝 대신 베란다를 타고 온다. 시칠리아섬의 오래된 골목길 속으로 마음껏 열려있는 베란다들을 보면 나도 성큼 저 베란다를 타고 들어가 그들의 저녁 식탁에 끼어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누에실처럼 엉겨있는 베네치아의 골목길로 간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여름,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낑낑거리며 숙소를 찾아 해메는 한 여자가 보인다. 고래 뱃속의 실핏줄처럼 어지럽고 뜨거운 골목들 속에 망연히 갇혀있던 그녀…,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느긋하게 열지어 묶여있는 곤돌라들 위로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오렌지빛이 번진 수면 위에 곤돌라들이 너울거린다. 그녀는 베네치아의 어느 골목길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어도 행복해서 눈물이 흐르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홀로 그 무수한 낯선 골목들을 헤맬 때, 때론 두렵고 쓸쓸하고 외로웠지만 또 가슴벅차게 행복하고 느긋하며 편안했다. 나는 내 맘대로 어떤 골목길에 들어설 수 있었고, 내 마음대로 또 어떤 골목길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숨어있던 모퉁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저 안엔 또 무엇이 있을까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즐거웠고, 새로운 골목길의 바람, 햇살과 또 스치는 사람들은 그 전의 골목길과 달라서 두근두근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에게 여행은 골목길이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저 끝에는 무언가 있다. 공원으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 뜻밖에 발견되는 미술관, 피자 한 조각 먹고가기에 딱좋은 분수대, 희안하게 생긴 소세지들이 주렁주렁 걸린 가게, 낡아서 예쁜 테이블과 의자를 내어놓은 노천카페, 꼬마아이, 연인들, 그리고 어제 오후 잠시 스치면서 기억된 어떤 여행자. "날씨 좋지?" 라며 그가 웃는다.

베네치아의 오래된 광장에서 만난 그 여행자는 어제 박물관의 텅빈 전시실에서 두 번쯤 스친 사람이었다. 우리는 '또 만났네?'라던가, '나 기억하니?'라는 식의 두번째 만남에서 대화를 꺼낼 때의 모든 방식을 생략한다. 어제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이었지만 오늘은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처럼 편안하고 느긋하게 함께 분수대에 걸터앉는다. 배낭에서 점심으로 아껴둔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면서 '너도 먹을래?'라는 식의 의례적인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노천시장에서 산 털모자를 보여주기도 하고, 광장 모퉁이의 작은 카페에서 마신 카푸치노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값싸고 맛있는 피자가게는 어느 골목에 숨어있는지, 서로의 사소한 여행이야기들을 유쾌하게 나눈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별히 기억되기도 하고 곧 잊혀지기도 한다.

우리 둘 다 아무런 규칙이 필요 없는 시간과 장소로 떠나와 있다. 여행자 대 여행자로 만난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짐 지울 것도 없이 간단하고 명쾌하다. 우리는 곧 그 곳을 떠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고, 우리의 만남은 그 곳에서의 짧은 순간으로 만족될 것이고, 우리는 또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므로.

몇 갈래의 골목들이 만나는 조그만 광장에 골목들은 모두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는 듯 열려있다. 우리는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나 각자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맞은 편에 앉은 후배작가가 하품을 하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회의를 주재하던 선배 작가가 다음 주 녹화 아이템에 대해 무언가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문을 걸면 어떨까, 저 창문을 열면 파리의 골목길이 내려다보이기를…, 바로 저 창문 밖에 시칠리아섬의 뜨겁고도 정겨운, 베네치아의 어지럽고 아름다운 그 골목길이 내려다보이기를……. "미노,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화들짝 놀라 입에서 나오는 데로 줄줄줄 아무 이야기나 꺼내놓는다.(그렇게 해야만 하니까) 여긴 여지없이 대한민국 2008년의 여름 22층짜리 빌딩 16층 사무실이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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