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버스에서 배운다

입력 2008-07-24 10:44:39

자가운전 온갖 스트레스서 해방/속도전 사회서 느림의 여유 만끽

불편했다. 기다리는 것이 불편했고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느려터져 답답했다. 그러던 것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어느 사이 몸을 맞춰 가기 시작했다. 자가운전의 버릇에서 부정기적이나마 버스와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기름값이 올라서만이 이유는 아니다. 때마침 에너지 절약 캠페인과 대중교통 이용률이 최하위라는 지역 사회의 분위기도 도움이 됐다.

운전이 미숙해서인지 핸들을 잡으면 불량운전자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 남은 바빠 죽을 맛인데 관광이라도 하듯 한가롭게 차선을 차지한 앞차에 화를 내다 보면 어느 사이 내 앞으로 잽싸게 끼어들어 흐름을 흩트려 놓는 새치기. 여차하면 바뀌어 길을 막는 신호등에 또 불법 주정차 차량들은 왜 그리 많은지. 꾀를 내 좀 서둘러 가려던 길을 막기 일쑤다.

여기다 느닷없이 날아든 속도위반 스티커는 아주 인내심까지 시험한다. 내비게이션도 달아보고 운전 습관을 자책해 보지만 속상하긴 마찬가지다. 며칠 전엔 감시카메라를 보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던지 이번엔 '신호위반' 딱지가 날아왔다.

그러던 차에 이따금씩 버스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버스는 내게 체념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냥 버스 기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내가 핸들을 잡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황색 신호에서 버스는 정차했다. 내가 바쁜 것과 버스 운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운전할 때 만나던 많은 장애물도 버스에서는 나와 무관했다. 버스를 타면서 체념의 지혜를 배우게 됐다.

버스를 이용하면서 미리 일정 수준의 준비를 하게 됐다. 버스 노선을 알아두고 빨리 가는 노선과 환승 정류장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즘은 대중교통 환경도 워낙 좋아졌다. 환승체계는 물론이고 버스 안에서도 정류장과 도착시간까지 예보해준다. 그래도 정류장까지 거리와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만만찮고 운행 시간이 더딘 만큼 넉넉히 잡아야 한다. 버스는 세상살이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처세술을 가르쳐줬다.

버스 승객이 되면서 이젠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예정된 시간에 버스가 오지 않거나 버스를 놓쳤다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속절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느긋함을 갖게 됐다. 기다림의 미학이 버스에 있었다.

버스에 앉아서는 창밖을 구경하거나 상념에 빠져들 수도 있다. 여유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신경 쓰는 손수 운전에서 해방돼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길 수도 있는 것이 버스가 안겨 준 여유이다.

21세기 들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느림'이나 '느리게 살기'가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빠름이 미덕이고 속도가 가치의 척도인 지금까지의 세상에 대한 반발에서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기술 혁명이 가져온 빠른 속도가 인간을 자신의 육체로부터 소외시키고 자연과 더불어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행복을 빼앗아 갔다"고 '느림'에서 지적했다.

소설가 김훈은 시간만 나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한반도를 종횡 누빈다. 도보여행가 김남희는 우리나라 땅만을 걷기엔 부족해서 사표를 내던지고 유럽의 골목길까지 지구를 '느릿느릿' 걷고 있다.

버스는 바로 이런 삶의 방식과 호흡이 맞는 세상살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일상에서 내려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생활방식이다. 구태여 자전거를 사서, 또 휴가를 내서 먼 길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그냥 조금 일찍 출발해서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에너지 절약이라거나 배출가스로부터 지구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구호는 그 다음이다.

버스에서도 자전거나 도보 여행에서처럼, 그러나 다른 온갖 표정의 인간 군상을 만나는 행운도 갖게 된다. 요즘 같은 삼복 더위, 냉방이 잘 된 버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버스 안에서 듣는 뉴스는 참 시시한 것들일 때가 많다. 때로는 승용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주 조그맣게 보이기도 한다.

이경우 논설위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