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로맨스 그레이

입력 2008-07-11 10:46:44

미국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은 노인들의 사랑을 밝고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60대의 음반사업가인 해리(잭 니콜슨 분)는 자기 나이는 잊어버린 채 30대 이하 여성과의 연애를 철칙으로 하는 바람둥이. 반면 극작가 에리카(다이앤 키튼 분)는 자신에겐 더 이상 사랑의 열정이 없다고 여겨 집필에만 몰두한다. 에리카의 딸과 사귀던 해리가 에리카의 집에 들리면서 두 사람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티격태격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로맨스 그레이'! 어쩐지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는 단어다. 미당의 시구처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나이가 주는 푸근함 때문일까. 세상사 굽이굽이 돌고 돌면서 겉도 속도 푹 익은 어른들의 로맨스라면 뭔가 다를 것 같다.

남녀 평균 연령 80세를 육박하면서 우리 사회도 이제 '노인들의 사랑' 문제에 관심을 가져볼 때가 됐다. 지금의 60, 70대는 과거의 40, 50대 못지 않게 젊다. 노인의 사랑, 연애 따위가 흉스럽다고 보는 건 편견 아닐까. 최근 스웨덴 고텐부르크 대학의 닐스 베크만 박사 팀의 연구에 따르면 성생활을 하는 70대 독신 남성은 지난 30년 사이 30%에서 54%, 여성은 0.8%에서 12%로 급증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노인의 적당한 성생활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시대다.

이런 가운데 최근 경기도 성남의 한 80대 할아버지와 60대 할머니의 '황혼 연애' 사건은 달라진 염량세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배우자와 사별한 두 노인은 5년 전 친구 소개로 알게 된 뒤 젊은이 못지 않게 재미나게 사귀어왔다. 그러나 할머니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자기 소유 땅 1만㎡를 할머니 아들 앞으로 소유권 이전 가등기를 해주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만 할머니가 만남을 끊어버렸던 것. 할아버지는 갑작스런 변심에 화를 이기지 못해 부동산 가등기 말소 청구 소송을 냈고, 1심 재판에선 이겼지만 2심에선 패소했다.

황혼의 사랑에 그만 홈빡 빠져버렸던 할아버지가 안쓰럽다. 편안히 여생을 보내야 할 나이에 속을 있는 대로 끓이게 생겼으니 말이다. 로맨스 그레이의 '빛과 그늘'이라고나 해야 할까.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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