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하늘꽃 나얀

입력 2008-07-02 07:42:24

당신의 기억은 얼마나 정직할까

제국은 급속히 허물어졌고 중앙의 명령은 지방에 전달되지 않았다. 무장 토호들은 앞에서 복종했지만 뒤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이유를 대며 중앙의 명령을 회피했고, 응하더라도 처벌을 면할 정도로만 행했다. 중앙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감찰관을 파견해 영(令)을 세우는 정도였다.

나얀은 쇠락한 몽골제국의 감찰관으로 쌍성총관부로 파견됐다. 쌍성총관부의 토호들은 겉으로 복종했지만 밤이면 이빨을 드러냈다. 습격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나얀은 이곳에서 토호의 수양딸 쏠마를 만나 사랑했다. 쏠마는 토호의 친아들 이자춘을 좋아했지만 그들은 어쨌든 형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얀과 쏠마는 사랑을 나누었다.

중앙정부는 쌍성총관부 무장토호의 병력을 차출했다. 다른 지방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토호세력은 군대를 파견했지만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숨어 다니거나 피해가 적을 싸움에만 임했다.

군사들이 떠난 사이 나얀은 무장토호세력을 제압해나갔다. 몽골제국에 복종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이 마을을 재정비하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 전장으로 나갔던 토호세력의 아들(이자춘)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쏠마는 남편 나얀과 연인이자 오빠인 이자춘이 화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과 반란토호의 문제였다. 나얀과 이자춘은 각자의 일에 충실했고, 쏠마는 이자춘을 택했다. 그날 밤 이자춘의 기습공격이 있었고 나얀이 정립한 질서는 무너졌다.

나얀은 쏠마를 깊이 사랑했다. 비록 짧은 기간 함께 살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쏠마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의 눈은 먼 곳을 보았다.

이자춘의 기습공격으로 진영이 무너지자 나얀은 대피한 후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토호세력을 몰아냈다. 살아남은 토호들은 도망쳤다. 그들은 숨어서 다시 기회를 노렸다. 토호세력은 나얀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나얀은 홀로 외롭게 바닷가를 거닐었다. 쏠마와 함께 거닐던 바다, 쏠마가 노래를 불러주던 바다였다. 그러나 이제 쏠마는 떠나고 없었다. 어른들은 말했다.

"아직도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여자를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쏠마는 가족의 의리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보 천치 같으니. 여자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없어. 너는 쏠마가 네게 마음을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어느 날 나얀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쏠마가 솔티고개에서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쏠마가 쓴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얀은 이자춘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도 홀로 말을 타고 솔티고개로 떠났다.

산정(山頂)의 침묵은 끔찍했다. 누군가 나얀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고, 나얀은 본능적으로 살기를 감지했다. 당장 숲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도망쳐야 했다. 주변의 공기, 숨죽인 새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 그 모든 것이 전사인 그에게 다급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얀은 움직이지 않았다.

'쏠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딘가 쏠마가 있다.'

나얀은 위험이 도사린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쏠마의 외침이 들렸다.

"달아나요. 나얀! 빨리!"

그 순간 누군가가 쏜 화살이 등에 박혔다. 나얀은 가까스로 일어나 쏠마의 목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쏠마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쏠마는 보이지 않고 가면을 쓴 괴한이 칼을 들고 달려왔다. 나얀은 괴한과 접전하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목숨을 건진 나얀은 이후 오래도록 '달아나요. 나얀!'이라고 외치던 쏠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쏠마는 '달아나요. 나얀!'이라고 소리쳤을까? 그날 현장에 쏠마가 와 있기는 했을까?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얀은 '달아나요. 나얀!'이라는 쏠마의 경고를 들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살아가는 내내 그 기억을 스스로 키우고 확신했다. '쏠마는 나를 지키려고 했다. 쏠마는 이자춘과 형제간이며, 그 가족의 의리로 그를 따랐을 뿐 나를 사랑하고 있다.'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내 기억은 내가 믿는 만큼 정직할까? 기억도 조작되는 것은 아닐까. 정작 쏠마는 거기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거짓 편지를 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얀은 쏠마가 자신을 사랑했으며 만나고 싶어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믿음과 바람이 환청을 듣게 했고 기억마저 조작했던 것은 아닐까.

이쯤에 이르면 객관적 사실은 무의미해진다. 쏠마가 현장에 왔거나 안 왔거나, '달아나요. 나얀!'이라고 소리쳤거나 아니거나 하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나얀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믿음과 확신을 근거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의미 없는 눈짓, 가벼운 인사, 누구에게나 베푸는 친절임에도 내가 그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면 그 '인사'는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가짜기억'의 힘으로 누추한 삶을 버티거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모른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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