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보이·파파걸, 결혼 이후에도…
오늘도 당신은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저녁에 친구가 만나자는데 가도 될까?" 아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아내는 지시하고 당신은 따른다. 공처가라고? 아니다. 이건 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정말 그럴까? 사사건건 배우자에게 물어보거나 답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당신. 배려와 존중이라고 포장하지만 당신은 아내 또는 남편의 '꼭두각시'일지 모른다.
◆나 이제 뭐할까?
사업을 하는 조진철(가명·51)씨. 조씨의 하루는 아내의 지시로 시작됐다. "오늘은 더우니까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 반팔 셔츠를 입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내가 정해준 반찬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함께 사무실에 출근했다. 아내는 조씨의 하루 일과를 꼼꼼하게 챙긴다. "오전에 거래처 김 사장님을 만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한 뒤에 오후에는 나하고 공장에 가요." 아내가 일러준 대로 김 사장을 만나고 나자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다. 조씨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 나 이제 뭐하지?"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내가 싫어하는 친구다. 조씨는 "약속이 있어서…"라며 전화를 끊었다. "마누라가 너 만나지 말래"라는 말은 차마 못했다. 집안팎의 모든 일은 아내가 결정했다. 아내가 정한 조씨의 통금시간은 오후 9시. 퇴근하면 하루종일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보고해야했다. 견디다 못한 조씨는 결혼한 지 22년 만에 아내와 전문상담센터를 찾았다. 조씨가 받아든 진단명은 '의존성 성격장애'였다.
조씨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배우자에게 허락 또는 지지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혼자 결정하지 못할 경우 '의존성 성격장애'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직장인 김태훈(가명·28)씨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아내의 전화에 시달렸다. 아내는 혼자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두부 한모를 사더라도 김씨에게 물어봤다. 이 회사 제품으로 할지, 저 회사 제품으로 할지, 유기농으로 할지, 몇 모를 사야 할지 끊임없이 남편의 결정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군말없이 받아주던 김씨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옷 사러 가는데 어떤 옷이 좋을지 골라달라거나 점심 메뉴를 정해달라는 전화에는 난감할 정도였다. 퇴근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전화기는 불이 났다. 직장생활도 큰 지장을 받았다. 결국 김씨는 아내와 전문상담센터를 찾았고 3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에야 증상이 호전됐다.
김정희 (사)한국발달상담연구소장은 "전체 부부상담 건수 중 20~30%는 의존형 부부 문제가 원인인데 대부분 시부모 등 다른 가족 구성원과 문제가 불거져 상담센터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왜 그들은 속박하고, 속박당할까
배우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부모의 '과잉보호'가 가장 큰 원인이다. '마마보이' '파파걸'이 결혼 후에도 대상만 바뀔 뿐 그대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들은 배우자를 찾을 때도 자신이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성향의 이성에게 끌린다. 부모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은 배우자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의존적인 관계에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문에 한쪽 배우자에게 의존성 성격장애가 있더라도 부부 간에는 꽤 좋은 금슬을 유지한다.
그러나 서로 성격이 맞지 않을 경우 아내는 남편을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남편은 아내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주부 이혜선(38)씨는 사소한 것까지 자신에게 묻는 남편이 처음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남편은 점점 정도가 심해졌고 남편에 대한 이씨의 실망감도 커졌다. 남편은 자녀 문제는 물론이고 시댁 문제, 회사 문제까지 이씨에게 의지했다. 친구를 만날 때도 아내와 동행했고, 사무실에 아내가 있어야 편안해했다. 심지어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과 말다툼을 벌일 때도 아내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다면 배우자를 수족처럼 부리려는 이유는 뭘까. 이는 자신의 틀과 경계 밖으로 배우자가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이 통제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과거 집성촌이나 대가족 제도에서는 쉽게 자신이 속한 집단을 찾을 수 있었지만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이 같은 경계를 만들기가 어렵다.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배우자의 행동이나 말에 질서를 부여하고 내 것임을 챙기고 확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장문선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경계와 가장 첨예하게 부닥치는 영역이 부모·자식 관계와 부부 관계"라며 "이들을 자신의 질서대로 움직이려 하는 욕구가 크다"고 말했다.
◆배려와 의존을 구분하자
의존과 배려는 엄연히 다르다. 배우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모두 '의존'은 아니다. '배려'와 '의존'의 가장 큰 차이는 '자신의 의견이 존재하느냐'에 달려있다. 배려는 배우자의 의견을 묻거나 감안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것이다. 반면 의존은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큰 불안감을 느끼고 배우자의 의견이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경우다. 심리 상담을 해보면 열등감이나 우울감이 크거나 심리적인 에너지가 낮은 사람에게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좋게 보면 사려가 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자녀다. 의존적 성향이 강한 부부는 정작 별 문제가 없더라도 그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는 정서적인 혼란을 겪는다.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게 때문이다. 가령 의존적 성향이 강한 엄마라면 오히려 아이에게는 '그것도 혼자 못하냐'는 식으로 질책을 한다는 것. 반면 독립적 성향이 강한 아빠는 아이에게 '그런 건 엄마한테 물어봐라'고 반응한다. 결국 아이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이 같은 정서적인 혼란이 계속되면 아이는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비행청소년, 무감각 등 정서장애를 겪을 수 있다. 장문선 교수는 "부부가 서로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지 먼저 통찰을 하는 게 우선"이라며 "아이가 정서적인 장애를 보일 경우 부모의 평소 성향에 대해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의존성 성격장애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보호받으려는 행동을 나타내는 성격장애. 의존상대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지나치게 의존해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해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들은 '나는 무력하고 부적절한 사람'이라든가, '나는 혼자서는 세상에 대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자신을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의존성 성격장애 진단법
의존성 성격장애를 겪는 이는 보호받고 싶은 과도한 욕구 때문에 복종적이고 매달리거나 이별을 두려워한다. 다음 항목 중 5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도움말 마인드플러스심리상담센터)
1. 타인으로부터 많은 충고와 보장을 받지 못하면 일상적인 일도 결정하지 못한다.
2. 자기 인생의 아주 중요한 영역까지도 떠맡길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다.
3. 지지와 칭찬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반대 의견을 말하기가 어렵다.
4. 자신의 일을 혼자 시작하거나 수행하기가 어렵다.(동기나 활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판단과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5. 타인의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불쾌한 일을 자원해 하기도 한다.
6. 혼자 있으면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하거나 무기력해진다.
7. 친밀한 관계가 끝나면 지지와 보호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급하게 찾는다.
8.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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