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이전지 결정 청천벽력 소식
"안동지역 전체가 도청유치로 기뻐하고 있지만 우리 마을은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고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지난 8일 경북도청 이전지로 발표된 안동 풍천면 갈전3리 조병매(63) 이장은 잔치판을 벌여야 할 기쁜 소식이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과 고향을 떠나야 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고 전한다.
수백여년을 이어온 마을 뒤쪽으로 검무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탁 트이고 기름진 들이 펼쳐져 한눈에도 언뜻 예사롭지 않은 길지로 보이는 이 마을엔 한차례도 전쟁과 재난이 닥치지 않았다. 산 이름 그대로 마을 주민들의 마음도 둥글고 순박하기만 하다.
50여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은 이곳에서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갈아 삶을 이어왔으며 계절이 바뀌는 대로, 또 세월이 흐르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철마다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풍속을 함께 누리며 이웃들과 한가족처럼 지내왔다.
이런 주민들에게 도청 유치 소식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고향을 떠나 살 생각은 꿈에서도 해보지 않았는데, 이제 현실이 된 것이다. 칠순에 가까운 어르신들에게는 더 '기가 막힐 일'이다.
3년 전부터 마을일을 맡아오고 있는 조 이장도 "앞으로 있을 상전벽해를 동네 어른들이 고스란히 겪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이제 마을일을 다른 이에게 넘기지도 못하고 어르신들의 마음 고생과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모두 지켜볼 일이 태산 같다"고 한다.
8일 도청 이전지가 발표된 이튿날 마을 주민들은 오랜만에 마을회의를 가졌다. 바깥 소식에 상대적으로 어두웠던 일부 어르신들은 도청이 마을로 온다는 말에 '믿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절반이 넘는 주민들이 남의 땅에다 소작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보상도 이들에게는 남의 일이다. 그만큼 생존의 문제가 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쥐꼬리만한 보상비를 들고 어딜 가더라도 정 붙이고 살아가기엔 어려울 것이란 볼멘소리들이다.
조 이장은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도청이 온다는 소식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웃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대토를 할 수도 없는데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주민들이 막노동을 할 수도 없고…"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런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큰 고민은 이웃과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나흘(음력 1월 4일)이면 마을회관에 모여 어르신들께 합동세배를 올리고 이날 하루 동안 잔치를 마련해오고 있다.
성씨는 다르지만 이들은 한가족처럼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하며 살아온 이웃들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피붙이들보다 이웃의 김씨 아저씨. 송씨 아지매, 박씨 할배가 더 정겨운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도청 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이웃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마을의 애환'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이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어서 주민들은 무슨 말로 서로를 위로해야 할지조차 모른 체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마을회의 날이 그랬다. 조금만 벗어나면 '땅값이 오르네, 무엇을 해도 돈벌이가 되네, 낙후됐던 안동이 살길이 열렸네'라는 말들로 들떠 있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러나 "앞으로 보상이 잘 되고 도청이 멋드러지게 들어서 안동을 발전시킬 수 있으면 우리 땅을 기꺼이 내놓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민들도 있다.
조 이장은 "아직 딸 셋을 시집보내야 하는데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때까지 씨를 뿌리다 떠날 생각이다"며 "앞으로 측량과 주민설명회가 있을 때 주민들이 집단 항의라도 벌이지 않을지 걱정이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보상가를 현실화해 주고 이웃에 집단 이주단지를 만들어 가족처럼 지내온 이웃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다. 이 모든 주민들의 바람을 조 이장이 앞장서 요구하고 이뤄내야 하기에 더 큰 짐을 진 듯 어깨가 무겁다.
"농투성이들이 뭐 욕심 있나. 그저 함께 어울렁더울렁 살아갈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그래야 타향살이의 설움과 쓸쓸함, 고통과 삶의 애환을 이웃사촌들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지. 행정기관이 주민들의 이런 소박한 바람을 내치지 않았으면…." 수심 가득한 조 이장의 얼굴이 신도청이 들어설 천하길지 풍천면 갈전3리 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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