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끓는 혁명가…詩는 신념의 몸짓
시인 고희림은 스스로 혁명가라고 했다. 마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 자신을 '혁명가'로 단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희림이 스스로 '혁명가'라고 했던 것은 자신을 담금질하려는 의지의 표명쯤이라 여겼다. 그러나 고희림은 "나는 피가 돌고, 끓어올라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며 스스로 혁명가라 칭하는 것은 자신을 가두는 장치가 아니라 태생적 본질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고희림은 민족작가회의 회원이며, 잡지 '시와 반시' 발행인, '대구사회 비평'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그저 스쳐간 사람이 아니라 그 잡지들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그만큼 참여적 성향, 행동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고희림은 지금, 여기 현재의 상황이나 모습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부조리는 끊임없이 연출되는 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현실 문제에 뛰어들어 따지고, 공격적인 시를 쓴다고 했다.
고희림의 물리적 환경은 우호적이다. 책임감 강한 남편, 반듯한 자식이 있다. 특별히 쫓기는 일도 없고, 긴장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처럼 우호적 환경에 대해 고희림은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시를 쓸 때, 시를 생각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고희림은 말이 없고, 좀처럼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고 했다. 가두고 억누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교사생활을 했지만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웅변학원을 기웃거리며 이른바 '말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았다.
"시를 쓰면서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하면 징징거림이 되기 일쑤였다. 징징거리는 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징징거리느니 입을 닫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징징거림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시는 달랐다. 시를 통해 나는 징징거리지 않고 나를 드러낼 수 있었고, 내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상대(독자) 역시 내 시를 통해 감동을 얻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는 나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치유하는 과정이다."
고희림은 시를 통해 사랑을 나눈다고 했다. 시라는 장르는 사람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발설하고 까발리고, 조지는 데 가장 적절한 장르라고도 했다. 자신은 시적 언어로 대화(소통)할 때 가장 편안하다고 했다. 인터뷰 중에 고희림은 종종 상욕도 썼는데 좀 과했다 싶었는지 '이건 시적 언어로 봐줘야 한다'고 변명했다.
고희림은 상스러운 욕을 자주 뱉었지만 그 언어가 완전한 욕의 구조를 갖춘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욕을 뱉었다면 그 말에는 격한 감정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욕은 단지 낱말이었을 뿐 격한 톤이 담겨 있지 않았다.
고희림은 스스로 '두주불사'라고 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착각일 것이다. 마시고 취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녀는 술은 자신에게 이완과 위로를 준다고 했다. 술을 마셔야 비로소 웃을 줄 알고, 감정도 드러낼 줄 안다고 했다. 더불어 자신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마음에 차지 않는 모든 것을 견디게 해준다고 했다.
"나는 술을 마시면 아름다워진다. 술을 마시고 망가지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나마 나를 드러내기에 그런 듯하다."
고희림은 술을 자주 마시지만 엉망으로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술 마실 때 알아봤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불쾌할 것이라고 했다. 불쾌한 평가를 듣고 싶지 않기에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싸구려 아파트도 아닌데 물이 샌다) 물이 새는 것을 보자니 요 말썽들을 나누어야겠다고 나는 관리실 소장을 찾아갔다. 소장은 보일라실 실장을 부릅니다. 실장은 보일라실 보조를 부릅니다. 말이 입구에서 옆구리로 갔다고 시린 아랫도리로 내려갑니다.' -고장난 물- 중에서.
고희림의 시는 공격적이고 다소 거칠다. 그의 시가 거친 것은 자기 생각에 대한 확신 때문일 것이다. 목표가 옳고, 가치가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흔히 방법이 다소 거칠어도 상관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고희림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 같았다.
고희림은 "나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부자든 가난하든, 목사든 깡패든 똑 같이 본다. 나는 사람을 구분하는 대신 확인할 뿐이다. 그럼에도 각각의 개인이 처한 위치와 그가 받는 대접은 다르다. 나는 누군가가 불합리한 대접을 받거나, 누군가가 불합리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참아 넘길 수 없다. 가난한 자에게 동전을 건네는 것,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은 우리의 책무다. 마찬가지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 역시 책무다. 그것은 내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시인 김용락은 "고희림은 민족현실, 계급현실, 성 모순 등에 대해, 이제는 사람들이 죽은 개 취급하는 것들에 대해 피해가지 않고 맞서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고희림은 학교 운영위원으로 학교업무를 간섭했고, 학부모로서 교복이 비싼 이유를 문제삼기도 했다. 직접 교복입찰 운동도 펼쳤다. 정치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사회적 문제에 간섭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다고 했다. 자신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개인적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이었다.
고희림이 사회문제와 이웃에 신경을 쓰자 그녀의 아들은 '엄마는 빨갱이다'는 말도 했단다. 고희림은 "내 아들은 좋은 집안에 태어났고 잘났다. 그렇다고 특권을 누리거나 껄떡대는 거 용서할 수 없다. 내 아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 못지 않게 사회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고희림은 참여적 시를 쓰지만 미적 아름다움을 도외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수사가 지나치면 본질이 훼손되고, 본질이 지나치게 강조하면 소통의 통로로서 문학의 기능이 묻힌다고 했다. 목적의식에 취해 거친 말을 마구 쏟아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컴퓨터 속에는 목적의식으로 무장한 시들이 천 편 넘게 들어 있다고 했다.
그 시들을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들이 다만 목청만 높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여작가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시인이며 시인은 마땅히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위의 시 '고장난 물'을 두고 "내가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적 아름다움이 부족하다는 자평이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 고희림은…
1960년 대구출생.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평화의 속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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