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식 아토스(798cc) 승용차를 타고다니는 김재근(42·대구 남구 대명동)씨. 그는 몇 달 전만 해도 경차를 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쩌다 고급 음식점이나 호텔 같은 약속 장소에 가면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중소기업 회사원인 자신의 월수입 200만원을 생각하면 경차라도 감지덕지할 만하지만 도로에서 불쑥불쑥 끼어드는 차들을 보면 경차라서 무시하나 싶어 괜스레 기가 죽기 일쑤였다. '경차를 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까?' 취재진은 이런 의문을 갖고 지난 3, 4일 이틀 동안 김씨의 아토스 차량과 지인의 벤츠 S320(3200cc) 차를 빌려 대구 도심 곳곳을 다녀봤다.
◆경차 푸대접은 옛말?
'경차=푸대접'이란 공식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고급 외제차와 한눈에 봐도 낡은 김씨의 경차를 타고 관공서, 유명 호텔과 고급 음식점, 골프장, 주유소 등을 둘러보니 차별 대우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4일 오후 2시쯤 대구 수성구의 한 고급 갈비집. 경차를 몰고 주차장에 진입하자 주차요원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식사하러 오셨어요?"라는 말에 "길을 묻기 위해 들어왔다"고 하자 상세하게 길을 가르쳐 줬다. 차를 돌려나올 때 "다음에는 꼭 식사하러 오시라"며 허리굽혀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1시간 뒤쯤 이번에는 수성구의 한 호텔 정문 앞으로 진입했다. 일부러 고급 외제 승용차 뒤편에 바짝 붙여 차를 댔다. 이내 호텔 정복을 입은 직원 한명이 달려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호텔 총무과를 찾고 있다고 하자 친절하게 건물 약도까지 건넸다.
경산의 한 골프장에 들렀을 때도 경차라고 얕보는 이는 없었다. 주차장에는 고급 외제차와 중대형 승용차가 즐비했지만 주차 안내원은 기자의 차를 안전하게 유도해줬다. 경차를 몰고 주유소에 들어갔다. 3곳에 들러 1만원씩 주유를 했다. 주유소 직원 역시 "차안에 쓰레기 없느냐"고 물었다.
5일에는 벤츠를 운전해 전날과 같은 곳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외제차 손님이어서 우대받는다는 느낌은 좀처럼 없었다. 중고차 가격으로 10만원도 채 받지 못하는 아토스를 탈 때나 1억2천800만원(2003년 구입 당시 가격)짜리 벤츠를 탈 때나 호텔, 주유소 직원들의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경차 전성시대
고유가 파고 속에 경차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대구 차량등록사업소에 따르면 대구의 경차(1천cc 미만)는 지난 1월 4만7천330대보다 5개월새 1천126대가 늘어난 4만8천456대로 나타났다.(표1)
대구 마티즈 동호회(D.M.C) 박병돈(36·사업)씨는 경차의 가장 큰 장점을 경제성이라 말했다. 중·소형 차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유류비는 물론 고속도로 통행료 50% 할인, 각종 세제 감면 등 경차를 타면 모두 16가지 혜택이 주어진다고 했다.(표2) 자동차시민연합에 따르면 경차 평생연료(35년 추정) 비용은 중형차보다 6천200만원, 대형차보다는 무려 1억600만원이나 절감된다.(표3)
경차를 '애마'로 선호하는 시민들이 늘면서 경차를 구입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진풍경까지 연출되고 있다. 지난달 경차를 주문한 이인호(34·중구 남산동)씨는 "요즘 경차를 구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아파트 분양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아차 모닝(999cc)은 지금 예약해도 차를 받기까지 5개월이나 걸린다. 기아자동차 대구지역본부 판촉팀 조진화 과장은 "현재 출고되는 모닝은 3월 15일 이전에 계약한 차"라며 "경차기준이 기존 800cc 미만에서 1천cc로 늘어난 효과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의 1~4월 자동차 판매순위 분석에 따르면 10위 안에 기아 모닝(3위)과 GM대우 마티즈(6위)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경차 아쉽다
지난 1월 경차를 구입한 김인수(31·남구 대명2동)씨는 "경차를 구입하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경차 종류가 너무 적다. 국내에서도 일본과 같이 다양한 경차가 출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경차 종류가 30여가지에 달한다. 반면 현재 국내에서 출시되는 경차는 마티즈와 모닝 단 두 종이며 공급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동차업계는 노조의 반대와 낮은 수익성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중대형 SUV나 대형세단 등의 영업에만 열을 올려왔다.
자동차시민연합 임기상(50) 대표는 "정부가 경차 생산 기업에 세금을 덜어주는 등의 정책적 지원을 통해 다양한 경차 생산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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